극장가를 휩쓴 애니메이션 열풍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단면
“이 세계는 평화롭고 주민들은 친절해요.”
게임 '다크소울' DLC 배경인 ‘에레미어스 회화세계’ 보스 캐릭터인 ‘반룡 프리실라’가 주인공에게 던진 대사다. 상상하지도 못한 곳에 함정이 숨어 있고, 모든 생명체가 플레이어를 공격하지 못해 안달난 세계를 안식처라고 부른다면 분명 미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때로 그런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게임 내 설정에 따르면 에레미어스 회화세계는 ‘태양왕 그윈’이 창조한 세계에 적응하지 못했던 이들의 도피처다. 이는 관점의 차이일 뿐, 누군가에게 지옥 같은 곳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늑한 집일 수 있다는 뜻이다. 미셸 푸코가 지적한 대로 정상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면, 비정상이라는 개념은 반드시 탄생하기 마련이며 이는 현실 속 세계에도 에레미어스 회화세계 같은 영역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로 ‘애니메이션’을 들 수 있다. 소위 ‘오타쿠’로 불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반론이 따를 순 있겠지만, 소위 오타쿠라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전형은 코를 찌르는 체취를 풍기고, 대인 관계에 서툴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는 광기에 가까운 애착을 보이는 편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타쿠들이 몸담은 애니메이션 속 세상은 현존하는 에레미어스 회화세계로 보인다.
때문에, 오타쿠 대부분이 ‘상업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자본주의에서 상업은 곧 남의 주머니에 든 돈을 내 주머니로 옮기는 행위를 의미한다. 돈을 옮기는 상황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한정한다면, 많은 경우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상업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이중 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법은 ‘의도된 결핍 설정’이다. 어디서나 완벽한 연예인보다 실제로는 지독하게 철저하지만, 극 중에서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가 사랑받는 모습이 그 증거다.
일본 상업 애니메이션은 이런 연출 노하우를 최소 70년 이상 쌓아 올린 결과물이다. ‘K팝 데몬 헌터스’의 주인공 ‘루미’에게 악령의 피가 흐르고, ‘체인소 맨’의 주인공 ‘덴지’가 성벽에 허덕이며, ‘귀멸의 칼날’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괴로운 사연을 지녔다고 설정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예술 전반이 감정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그 방향을 철저하게 계산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결국, 오타쿠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자신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사회 속에서 잘 어우러지는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욕구가 큰 사람인 셈이다.
애니메이션 속 세상이 계산적이라는 증거는 ‘갈등’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 속 세상에서는 현실과 같은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구체적으로는 ‘서사적 갈등’은 있지만, ‘관계적 갈등’이 부재하다. 현실 속 관계는 갈등의 연속이다. 부모와 자식, 절친한 친구, 직장생활 속에서는 각각 잔소리, 다툼, 정치질이 끊이지 않는다. 더러는 이 때문에, 더러는 연을 끊거나 절교하며, 퇴사를 결심한다. 결국, 관계는 갈등이 지나치지 않도록 그 수위를 끊임없이 조절해나가는 고통 속에 유지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 세계에서는 이 같은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다툼이 없다’기보다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럽지 않아도 된다’는 편에 가깝다. 애니메이션 속 갈등은 서사를 진전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애니메이션 속 갈등은 많은 경우 부모와 자식 간 갈등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친구 사이 갈등은 관계가 더 깊어지는 수단이 되며, 직장 내 갈등은 성과에 도달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다뤄질 뿐이다. 오타쿠에게 애니메이션 속 세상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워야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기 때문인 셈이다.
오타쿠에게 애니메이션이라는 존재는 ‘에레미어스 회화세계’와 같은 장소다. 현실에 충실한 이들에게 결핍은 극복해야 할 과제고, 관계 속 갈등은 당연한 부산물일 뿐이다. 소위 ‘일반인’이라 불리는 정상 세계 사람들이 오타쿠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다른 탓이다.
최근 뉴스에는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 맨’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이 각각 520만명과 150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한때 이해할 수 없었던 취미로 여겨졌던 애니메이션은 어느새 오늘날 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결핍을 원동력 삼아 공감대를 형성하고 갈등 없는 관계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화상(畵像)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