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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잃은 교회 빈 자리엔 ‘지식’만

무속에 열광하는 사회, 힘 잃은 교회의 자화상

by 전지훈

K-팝 아이돌이 퇴마하는 애니메이션이 OTT 플랫폼 상위권을 차지하고, 무복 입은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청춘드라마 시청률도 14%를 넘겼다. 지난해 5월 영화 ‘파묘’가 극장가를 휩쓴 뒤로 우리 주변에서는 무속을 소재로 한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주 경향신문은 성해영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성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를 “종교가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맞는 말이다. 전광훈과 손현보 목사가 탄핵 정국에 반탄(反彈) 진영을 이끌고, 김건희 여사를 겨냥한 3대 특검 조사 소식에 김장환 목사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모습이 그 증거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교리를 주장하면서도 세상과 같은 모습을 띤다.


교회가 겪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8장은 고린도 교회도 오늘날 한국 교회와 비슷한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항구 도시였던 고린도 지역에서 기독교는 ‘소수 종교’였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규정하는 종교가 사회 시스템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면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고립을 자처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고린도전서 8장은 바울이 건넨 해결책이었다. 긴 답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지식이 아닌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가 된다. 제아무리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지만, 여기에까지 사랑을 들먹여야 할까 싶긴 하다. 하지만, 바울의 발언은 지독하게 현실적인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기까지 했다.


바울이 강조한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식에 의존하지 말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눈에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라’였다. 이 두 메시지는 결국 ‘배려’라는 사회적 가치로 귀결된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지식에 의존하지 말라는 부분이다. 지식은 통상 우리가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회적 통념과 규범, 교리 등 개념을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지식의 한 갈래인 규범과 교리가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별하는 근거로 활용됐다는 사실은 지식이 ‘통합’이 아닌 ‘차별’이라는 가치를 지향함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비춰 볼 때, 바울은 교인들이 ‘지식’에 근거해 사회 풍습을 따르는 사람들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수가 평소 강조하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교리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타인의 눈에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라’는 메시지에도 ‘배려’의 가치가 담겨 있음은 마찬가지다. 이는 흔히 타인의 평가에 따라 행동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미로 오역되기 쉽다. 그러나 이 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내 행동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가 아닌, 내 행동이 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있다. 이는 ‘예수를 조금 더 아는 사람’으로서 신앙이 미숙한 사람들에게 내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 번 더 생각하고, 나아가 그 판단을 흐리지 않도록 ‘배려’하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 같은 내용에 이단 풍습이 널리 퍼졌던 고린도 지역 교인들이 사회를 존중하면서도 ‘배려’라는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구분되기를 바랐던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성경을 보니, 꽤 오래전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을 보고 인권 변호사를 꿈꾸게 됐다던 한 청년에게 해 준 조언이 떠오른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지식은 남에게서 온 것’이고 ‘지혜는 내 안에서 솟은 것’인데, 그중 으뜸인 지혜는 ‘공존하기 위한 지혜’다”라고 말했다. 기독교계 종교보다 불교계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던 노 전 대통령이 성경에 통달했을 가능성은 작다. 그러나 그의 말속에는 분명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사랑’이 담겨 있다. 결국 참된 기독교인은 교회에 나가면서도 종교와 지역, 나이, 성별 등 지식을 앞세워 선을 긋는 사람이라기보단, 교회에 나가지 않을지라도 배려하는 마음으로 공존을 꾀하는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길고 긴 이야기 끝에 오랜 의문 하나가 풀렸다. 예수는 자신을 “율법을 폐하러 온 사람이 아닌, 율법을 완성하러 온 사람”이라고 불렀다. 사회 제도적 측면에서 법은 언제나 후행지표다. 제아무리 완벽한 법을 만든다 해도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얼마 전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후 헌재가 1987년 헌법 조문을 들여다보며 넉 달 넘게 시비를 가렸던 사례가 있지 않나. 이런 측면에서 예수는 시시비비를 가릴 ‘법조문’을 완성하러 온 신분적인 ‘왕’이 아닌, 우리의 행동 규범의 기준이 되는 ‘사랑’의 가치를 정립하러 온 도덕적 ‘지남철’ 같은 존재였음이 드러난다. 곧 주일이 지나고 새 일주일이 시작된다. 종교가 정치 집단과 야합하고, 동성애자를 사탄으로 규정하며, 자신을 수사하는 특검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소식들도 함께 돌아온다. 사랑 없는 교회에 힘이 있을 리 없고, 범람하는 무속 흐름 속 한국은 성경 속 고린도와 닮았지만, 오직 권면해줄 사도 바울의 존재만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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