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쁜 이야기

by 가죽지갑 오븐구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다른 반의 어떤 여자애(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랑 친하게 지낸 적이 있다. 그 애의 기숙사 룸메이트들이 그애가 방에서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는데 나랑 인사하는 걸 봤다고 가능하면 친하게 지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내 방에 자주 초대하거나 놀러와서 그 애랑 같이 놀아달라 같은. 나는 일단 신경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아주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지만 동아리가 같았으니까 같이 가거나 내가 그애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거나-간식을 사오는 길에 마주치면 손에 들고 있던 봉투에서 한 봉지쯤 꺼내주는 식이었는데 그애는 늘 나는 너한테 받기만 하는 것 같다고 하며 웃었다- 했었나... 숫기 없는 여자애가 숫기 없는 여자애한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결과적으로는 잘 안 됐지만.


그 애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나 주변 환경에 대해 아주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나와 친해지기 시작하고 2~3주쯤 지난 뒤에는 주로 나에게 주변에 대한 불평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동아리 부장선배가 싫어서 같이 당번하고 싶지 않다던가, 같은 방 룸메이트들이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하는 비밀 이야기를 옮기지 않는 편이라서 묵묵하게 듣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더 그 애의 험담을 가속화시켰지 않나 싶다.


그 애도 그 애지만 나도 그때는 어렸어서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 때였는데, 그 애의 사소한 버릇(웃을 때 옆사람-주로 나-을 세게 치는 것, 같이 걸을 때 가만히 있지 않고 팔짱을 끼거나 어깨에 기대는 등 스킨십하는데 무게를 과다하게 싣는 것-나는 그때 운동을 좋아하지 않아서 체력이 약했는데 정말 힘들었다- 등)이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기도 해서 사실은 별로 그애와 같이 있는 게 즐겁지 않았다. 그렇지만 솔직히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애가 전학갈 거라고 말했을 때 조금 해방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티는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당장 가는 건 아니고 수속 같은 것 때문에 2학기가 시작되고 일주일 정도 더 다니다가 간다고 했었나... 자세한 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랬었던 것 같다.


문제는 방학 때 일어났다. 그해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낮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는 굉장한 여름이었다. 나는 그때 학교에서 있는 특강에 참여하느라 방학인데도 몇 명의 학생들과 함께 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동아리는 방학에도 나와서 어떤 일을 계속해야 하는 귀찮은 당번이 있었는데, 와 같이 기숙사에 남아있던 어떤 애가 동아리 방학 당번 날짜를 잘못 계산했나... 같은 이유로 원래 당번을 하기로 한 날에 참여하게 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나도 그 기간에 특강을 듣고 있어서 당번을 대신할 수 없었다. 곤란하겠다고 생각하고 더운 걸 느끼고 싶지 않아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당번으로 곤란해진 애에게 잠시 그 애와의 전화를 대신 받아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 비몽사몽으로 여보세요?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그 애는 대답했고, 나는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가 너랑 대화하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 이야기하라고 이야기하고 전화를 옆에 있는 애한테 넘겼다. 들어 보니 전학갈 예정인 그애에게 당번을 넘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학가는 애가 무슨 당번이지...


어쨌든 나는 그 애들이 몇 번쯤 전화를 서로에게 넘기는 걸 멍하니 보고 있다가 왠지, 충동적으로 전화를 다시 넘겨받아서 그 애한테 우리 이제 얼굴 보지 말자는 이야기를 했다.


졸린 상태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솔직히 진심이었던 것 같긴 하다. 나는 그때쯤에 이미 그 애의 주변사람 험담에 기가 질린 상태라서 사실 그애를 조금 많이 불편해하고 있었다. 개학하고 그 애가 학교에 다니는 일주일 동안 또 주변 사람의 험담을 듣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 번 정도는 그애에게 못된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은 다 지금의 내가 생각해낸 추측일 뿐이고 그때의 내가 무슨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건지는 지금으로서는 딱히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동아리 학생들과 마찰을 겪고 있던 중에 그나마 교류가 있던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듣게 한 것은 정말로 유감이다.


나는 동아리나 당번과 상관없이 순전히 그 애와 알고 지낸 한 학기 동안만의 상황으로 그 애와 연관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충분히 동아리 당번 문제로 친구와 절교당한 거라고 오해받을 상황이었다. 상황을 고르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린 내가 나빴다. 그날의 당번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애는 자기가 당번 배분의 일로 이런 압박을 받았으며 그 끝에 다시는 보지 말자는 식의 말까지 들었다는 장문의 카카오톡을 동아리 단톡방에 올리고 나갔다. 학기가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리고 원래 다니기로 했던 일주일 동안 등교하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학교폭력 같은 거라고 생각되고 부장 선배한테 엄청 혼났다. 혼나면서도 나는 그 애가 부장선배를 엄청 싫어해서 같이 당번일 때 여러번 나한테만 싫다고 말할 정도면 당연히 둘이 사이가 엄청나게 나쁘고 여러 번 마찰이 있었을 줄 알았는데 부장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서 좀 당황했던 것 같다. 부장은 그 애가 친하게 지내는 건 나밖에 없는데(이건 나도 몰랐다 진짜 나밖에 없었어? 반도 다른데?) 나한테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떤 심정이겠냐고 나를 심하게 혼냈다. 그러게...


그 애의 룸메이트도 말을 물으러 왔었는데 그애가 너희를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말에 "그래? 우리가 걔 과자를 좀 많이 먹긴 했지." 같은 대답을 했다.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악감정은 없어 보였다. 그것이 그 애가 나에게 했던 악담을 남-그리고 악담의 당사자-에게 옮긴 처음이자 마지막인 일이다. 그 후에는 지금까지 안 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알고 보면 그애가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나한테만이었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얘기되던 주변인들은 전혀 짐작가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애의 험담을 교차검증하기엔 너무 어렸고 인간관계에 서툴렀을 때라 이런 상황의 대처법을 전혀 몰랐어서 더 혼란스러워졌다. 상황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나를 변호하지도 못하고 혼내는 말에 변명하지도 못하고 모두가 내가 나빴다고 했고 학폭으로 신고당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그 애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니고 누구더라... 부장인가? 동아리 선배인가?


그래서... 혼나고 겁먹는 바람에 그애한테 장문의 사과 카톡을 남겼고 그애는 읽씹했다. 딱히 학폭 같은 걸로 걸리지도 않았다. 그 일은 그대로 지나갔고 나도 그때 일을 잊었다. 나는 원래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때 일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있으면 십 년이 되는 지금 갑자기 기억났다.


내가 나쁜 거겠지...


그애와 함께 지내던 1학기 동안은 그애에게 미안할 짓을 하지 않았고 방학에 있었던 일의 사과는 이미 그 해에 했다.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도 있다. 지금 정신연령으로 그때로 돌아간다면 학기 중에든 방학에든 그때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적어도 이상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말 같은 건 안 했겠지. 사람 대하는 게 서툰 것은 아직도 딱히 고쳐지지 않았지만 그때보다는 나이가 들었으니까. 기억난 김에 일기 대신 여기에 적는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애한테도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고 싶다. 왜 걱정해 주던 룸메이트들을 그렇게 싫어했으며 왜 사이가 나쁘지도 않은 사람들의 험담을 나에게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옛날에 괴롭힌 사람을 추궁하는 거냐고 비난받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정말로 궁금하다. 왜 그랬을까....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그 해 2학기에 시험 일주일 전 교과서와 수행평가 포트폴리오를 도둑맞는 피해를 당했다. 범인은 못 찾았고 딱히 주변에서도 교직원도 주범을 찾겠다거나 내 성적 보전을 도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런 학교였다. 앞에 이야기한 일련의 사건에서 어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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