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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쓰는 필기구들

기록

by 가죽지갑 오븐구이

만년필

나는 중학생 때부터 손목이 안 좋았다. 볼펜 같은 힘줘서 써야 하는 필기구를 쓰면 손목 관절이 덜컹거리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때쯤부터 가벼운 플라스틱 소재의 만년필을 대신 사용했다. 만년필은 힘을 주고 누르지 않아도 잉크가 나오니까 좋았다. 플라스틱 몸통의 저가형 만년필은 볼펜보다 가볍기도 해서 한동안 잘 썼다. 아직도 내 책상에는 노란 뚜껑의 카쿠노(안에는 이로시주쿠 죽림)가 현역으로 자리하고 있다. 카쿠노는 닙에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어서 골랐는데 얇게 나오고 가벼워서 자주 쓴다. 잉크가 잘 졸아든다는 단점은 있지만 어차피 난 멀쩡한 잉크도 병 닫는 걸 잊어서 가끔 졸여 쓰니까 큰 문제는 없다.


만년필을 쓰게 된 후에는 꽤 이것저것 써본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만년필도 그렇고 잉크도 그렇고... 한동안은 딥펜에 빠져서 노트필기를 딥펜으로 한 적도 있다. 꼬냑브라운을 펜촉에 묻혀서 식물의 학명 같은 것을 몇백 번씩 써내려갔다. 잉크병을 세 번쯤 엎고 나서 딥펜을 향한 열정은 사그라들었지만 그때 사둔 잉크들은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잉크

잉크는 처음에는 파카의 블랙과 블루, 블루블랙 잉크를 사용했지만 요 몇 년 간은 이로시주쿠 죽림을 제일 많이 쓴다. 그라폰 꼬냑브라운이나 이로시주쿠의 다른 색 잉크들, 제이허빈의 녹슨 닻, 그 밖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잉크들도 가지고 있지만 다이어리를 정리하거나 노트에 필기할 때는 약간 졸아든 대나무색 초록 잉크가 제일 편하다.


펄 잉크는 예쁘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관리가 힘들어 보여서 한 개도 안 가지고 있다.



노트

만년필은 종이를 많이 탄다. 나는 EF같이 아주 가늘게 나오는 닙을 선호해서 좀 별로인 종이를 쓰면 종이가 보풀이 지거나 그러는 경우도 있다. 만년필 잉크가 볼펜 잉크보다 묽기 때문에 번지기도 많이 번진다. 아주 좋은 종이를 쓸 필요는 없고 적당히 두껍고 조밀한 구조로 된 종이를 고를 필요는 있다. 갱지 같은 것만 아니면 된다. 의외로 다이소 노트 중에 꽤 쓸만한 게 있기도 하다.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 노트는 글입다공방의 레저버노트다. 까만색 표지에 줄이 그어진 속지가 들어 있는 링노트인데 특별히 아주 좋은 건 아니고 그냥저냥 문제 안 일으키고 쓸만하다. 만년필용으로 만들어진 노트 중에서 접근성이 좋고 막 엄청 비싸지 않은 노트 중에 골랐는데 괜찮길래 몇 년째 이것만 쓰고 있다. 찾아보면 더 싸고 좋은 노트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시간을 내서 찾을 정도로 필요한 게 아니라서...


연필 쓰는 노트는 쓸 수 있는 종이 폭이 넓어서 좋다. 요새는 페이퍼블랭크스의 가장 작은 사이즈 하드커버 수첩을 쓰고 있는데 종이가 특별히 좋은지는 잘 모르겠고 예뻐서 쓴다.



연필

만년필만 쓰고 살 줄 알았는데, 학교 일로 연필과 샤프를 써야 하는 일이 늘었다. 요새는 다 컴퓨터로 한다고는 해도 아직 손그림이 필요한 분야는 있어서, 손으로 도면을 그려야 했던 고등학생 때는 다양한 굵기의 샤프를 사용했고 컴퓨터로 작업하는 지금도 가장 처음 이야기하면서 만드는 스케치는 연필을 사용한다.


최종 작업물은 컴퓨터로 만들기 때문에 더 이상 얇은 선만 고집할 필요가 없어져서 지금 쓰는 필기구는 주로 2B와 4B연필이다. 손에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종이에 스치기만 해도 색이 묻어나는 진한 연필이 좋아서 H가 들어가는 연필은 쓰지 않는다. 그만큼 자주 깎아야 하지만 나는 연필깎는 작업을 꽤 좋아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연필은 스테들러 마스 루모그라프와 미츠비시 하이유니, 그리고 백합 향기가 나는 다른 연필을 자주 쓴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연필은 백합향이 난다는 것 외에는 따로 이야기할 게 없어서(진하기가 내 취향이 아니다) 스테들러와 미츠비시 연필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스테들러의 그 파란 연필만을 써야 하는 시기를 겪었어서 스테들러 연필이 많다. 한동안은 정말로 그것만 썼다. 꼭지가 까맣고 몸통이 파란 그 연필과 같은 브랜드 지우개, 같은 브랜드 연필깎이와 피그먼트 라이너까지 다 스테들러만 썼었다. 파란색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건 몇 년 후의 일이다.


스테들러 연필을 썼을 때는 연필의 품질이나 성능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그렇긴 하다 연필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종이에 그어서 나오면 나오는 거고 안 나오면 안 나오는 거고... 파란색 연필을 쓰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성능은 그다음에 신경쓸 문제였다. 그래도 스테들러 연필이 영 못 쓸 물건이라는 뜻은 아니다. 자루당 천 원 넘어가는 연필부터는 뭘 써도 크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품질이 상향평준화되어서 크게 신경쓸 게 없었다는 뜻이었다.


이후에는 잠깐 향기 나는 연필에 홀려서 그것만 쓴 시기가 있었지만 넘어가고, 그 후에 쓰게 된 건 미츠비시(그 전범기업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기업이라고 한다.) 하이유니 2B다. 내 돈으로 산 건 아니고 어디서 한 다스를 받았다. 스테들러는 틴케이스에 담겨 있는데 미츠비시는 가죽 질감을 흉내낸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있더라. 이 불그스름한 연필은 판매가를 보면 스테들러보다 약간 더 비싼데, 그래서 그런지 깎을 때 나무가 쥐어뜯기듯이 깎이는 경우가 좀 더 적은 것 같다. 필기감도 나쁘지 않다. 제조국 차이인지는 몰라도 스테들러 2B보다 약간 더 진하게 나온다. 마침 스테들러에 집착하던 시기가 끝나고 그때 사둔 연필들이 몇 자루만 남기고 다 소모되어서 그냥 썼다. 지금도 쓰고 있다. 연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 아는 게 없어서. 그것 말고도 잡다한 연필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금속 캡 같은 것이 달려서 지우개가 있는 연필은 손에 닿는 서늘한 느낌이 싫어서 안 쓰고 있다. 그런 이유로 블랙윙은 한 자루도 없다.



연필깎이

본가에 있는 것은 그 유명한 기차 모양 연필깎이다. 나랑 아마 나이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아직도 안 망가지고 일을 잘 하고 있다. 그거 말고는 어디서 받은 것 같은 버섯 모양 연필깎이가 있는데 연필 잡아주는 부품의 힘이 너무 세서 연필 도장에 흠집이 생기고 왠지 어디선가 계속 흑연 가루가 새는 것 같아서 자주는 안 쓴다.


일상적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는 것은 스테들러의 연필밥 수납하는 통이 달려 있는 2홀 휴대용 연필깎이다. 가볍고 주먹보다 작고 잘 깎이며 색연필용 구멍도 따로 있어서 색연필도 깎을 수 있다. 연필밥 담는 통도 꽤 커서 열 자루 정도는 깎아도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오래 써서 약간 날이 무뎌진 감이 있어서 조만간 같은 물건을 하나 더 살 계획이다.


휴대용 연필깎이로는 M+R사의 황동으로 된 조그만 연필깎이도 하나 가지고 있다. 내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한 작은 물건인데 정확히 어디서 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어디서든 샀으니 가지고 있겠지. 이것도 꽤 잘 깎인다. 조그맣고. 하지만 연필밥 담는 통 없이 날만 있어서 밖에서는 가루 날릴까 봐 잘 안 쓰고 집에서만 밑에 뭐 받쳐두고 쓴다. 보고 있으면 귀엽게 생겼다.


커터칼로 연필을 깎을 수는 있는데 솔직히 잘 하지는 못한다. 손 다칠 것 같고 애초에 휴대용 연필깎이를 가지고 다니니까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미술하는 애들처럼 칼로 특정한 형태의 연필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충 뾰족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필요성을 못 느껴서 연습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언젠가는 하겠지. 근데 요새는 자동으로 연필 깎아주는 기계까지 나온 마당에 그럴 일이 있나 싶긴 하다. 연필도 요새는 애기들이나 특정 수요층 아니면 잘 안 쓰이는 판에...


필통

아마 8년쯤 쓴 고양이 귀가 달린 천 필통을 사용한다. 내가 산 건 아닌 것 같고 언제부턴가 집에 굴러다니던 건데 안 망가져서 계속 쓰고 있다. 좀 꼬질꼬질해졌기는 한데 들어가야 할 게 다 들어가서 앞으로도 계속 이걸 쓸 것 같다.


연필캡

필통에 넣는 연필에는 귀찮아서 캡을 안 씌운다. 가루가 날려도 그러려니 한다. 기본적으로 밖에 가지고 다니는 물건은 언제 망가지거나 더러워져도 아깝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편의성을 더 중시하게 되는 것 같다.


필통 없이 가방 앞주머니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연필 한두 자루에는 연필캡을 씌운다. 지금 쓰는 것은 검은 가죽으로 된 연필캡인데 연필 길이를 연장해주는 기능은 가죽이다보니 기대할 수 없고 그냥 심 부러지는 것과 흑연가루 날리는 걸 방지해주는 역할만 한다. 가벼워서 좋아한다.


그거 말고는 나무로 된 연필캡도 있다. 체리나무로 만들어진 건데 그건 몽당연필용이라 최근에는 몽당연필을 가지고다니지 않아서 집 서랍에만 보관중이다. 가죽보다는 약간 무겁고 형태감이 있다. 그래도 귀엽게 생겼다. 동글동글하고.


플라스틱 연필캡은 어렸을 때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오래 쓰면 갈라지고 부서져서 지금은 한 개도 없다. 아마 앞으로도 스스로 구매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금속 연필캡은 손에 닿는 서늘한 느낌이 싫어서 안 쓴다.


물감

물감은 몇 년 전에 미젤로 골드 18색을 사서 계속 그것만 쓴다. 정확히는 그때 산 걸 아직도 다 못 썼다. 물감도 유통기한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직도 쓸만하게 색이 잘 나온다. 하프팬에 짜서 손바닥만한 팔레트에 하나씩 자석으로 붙여 쓰는데 그냥저냥... 색 잘 나오고... 그냥 물감이다. 과제용이나 연하장용으로 주 1~2회 간격으로 쓰는데 슬슬 떨어진 색이 생겨서 그것만 낱색으로 사려고 한다.


수채화용 지류

과제용으로는 너무 비싼 물건을 쓰고 싶지 않아서 파브리아노에서 나온 수채화용 스케치북을 쓴다. 코튼 함량 25%에 평방미터당 300g이랬나... 별 문제없이 과제 잘 하고 있다. 연하장용으로는 캔손 아르쉬 수채패드(코튼 함량 100%인 것)를 쓰고 있다. 사실 무슨 차이인지는 잘 모른다. 조성이 다른 건 알겠는데 내가 막 수채화를 오래 배운 것도 아니고... 코튼 들어간 종이가 안 들어간 종이보다 덜 울고 보풀이 덜 일어나는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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