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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짓기

by 이공칠

서양 고전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친숙해진다. 아직 온전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기독교인이 될 것이라는 기묘한 믿음이 있다. 어설프게 믿고 있는 게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고 조심스럽지만, 이와 관계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설프게 썼으니 어설픈 사람들은 좋아할 것이고, 어설프지 않은 사람들은 싫어할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 어떻게 써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이리저리 부는 바람처럼 쓰려한다.



때는, 내가 가장 무기력할 때이다. 어딘가에 썼을 텐데, 복학 한 이후에 나는 다시 힘들었고, 그래서 책에 의존했다. 어설프게 카뮈의 시시포스가 나를 위로하던 때다. 친구와 나는 3월 제주도 여행을 준비했다. 2박 3일 정도를 계획했고, 3월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제주도에 있을 때, 불안감을 느꼈다. 도시와 떨어진 이곳의 바다나 오름들, 제주도의 시내까지 어딜 가든 불안했다. 그 기묘한 불안감의 이유를 처음에는 찾지 못했다.


내가 찾은 이유는 이 거대한 곳이 섬이라는 것이다. 당시 나는 기껏해야 한 살부터 열두 살까지 서울의 허름한 곳에서 살다가, 당시 신도시인 한 곳으로 내려와 쭈욱 살았다. 어찌 보면 제주도가 내가 살았던 곳보다 더욱 거대한 곳이다. 그러나 섬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나는 세상과의 단절을 느꼈고, 그 즉시 마음속에 불안함이 생겼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서 서양 고전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말도 안 되게 나의 기묘한 불안감을 엮으려고 한다. 나는 신이 존재함을 느낀다.



나는 신이 존재한다 믿으며, 신에게 인간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개미에게 하는 짓과 비교가 안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자유의지와 반하는 운명을 믿는다. 혹여나 내 글을 좋아하거나 아니면 지독하게 싫어해서 샅샅이 분석한다면 내 말들이 서로 모순됨을 느낄 것이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이 글을 나는 소설로 생각하는데. 나는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운명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왜? 운명을 미워하는가? 운명이란,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이다.


자. 한 가지 묻고 싶다. 당신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가? 아니 운명을 볼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아니 없다. 아무도 자신의 혹은 누군가의 운명에 대해 알 수 없다. 내가 믿는 운명은 그런 것이다. 결국 아무도 모른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믿는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의 조종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결과이다. 내가 맨 위에 말을 했다. 나는 언젠가 기독교인이 될 운명이라고, 아마 지금 쓴 모든 글을 후회하고 기독교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나는 할 수 있는 반항을 한다. 그게 나의 운명이고 내가 한 일에 대한 결과이다. 어떠한 노력도 없이 운명이란 핑계를 대려는 것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 있다. 나는 편리하게 운명이란 변명을 할 수 있다. 그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노력을 하든 안 하든 나는 결국 어떠한 결과를 가지게 되는데. 그래서 나는 나의 신과 운명을 섬긴다.



이제 이러한 믿음에서 내가 하려고 한 이야기가 나타난다. 인간의 유일한 권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름을 짓는 것이다. 창조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은 그저 그러한 것들에 이름을 짓고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소재이고 소설이다. 그래서 아마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왼손에 ‘플립플롭’이라는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나는 늘 글을 쓴다면 제목을 먼저 짓는다. 늘 다른 것들보다 소재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 소재에 이름을 붙이고 그다음 지금처럼 쓰고자 하는 내용을 붙인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신성한 일이다.



내가 무언가를 짓고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남기는 것. 이름을 남기는 것. 나는 글을 쓰기 전까지 두려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바른 글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진정으로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일까? 간신히 소설에 이름을 빌린 내 이야기인가? 타인의 이름을 쓰고 이런저런 설정을 붙인 그런 글일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글을 쓴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늘 글 쓰기를 시도할 때마다 나의 어설픔과 나의 유치함에 금세 포기하곤 한다. 그래도 써야 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볼품이 생겼다는 것을 잘 안다. 이를 위해서라도 써야 한다. 나는 나라는 사람을 더 알리고 싶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내가 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말싸움에 져서 울 때부터일까? 아니면 더 어린 시절 함을 받으러 왔을 때, 부끄러움에 하지 못한 말을 참고 엉엉 울 때였을까? 모르겠다. 내가 지금 말을 거칠게 하는 이유인가? 내가 카뮈의 책을 읽고 나와 세상을 억지로 단절시키면서도 나를 온전히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까?


나는 나의 이름이 하나의 무언가가 되기를 바란다. 그게 내 운명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움직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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