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에 이혼 고백은 필수?
“선생님, 사실은요 제가 이혼을 했어요…”
십여 년 전. 학부모 총회가 끝난 텅 빈 교실. A의 어머님은 내게 비밀 지령을 속삭이듯 ‘싱글 맘’ 임을 고백했다.
당시 학부모님들은 이혼 사실을 쉽게 밝히지 못했다.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혹여 내 자식에게만 ‘한 부모 가정’이라는 편견을 씌우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혼녀에 대한 사회의 시선. 삐딱하고 지저분했다. 어렵게 이혼하고 나서도 죄인처럼 그 사실을 감춰야 했다.
미국에 살다 보면 자주 문화 충격을 받는다. 잔잔한 파도와 쓰나미 같은 충격을 번갈아 받게 되는데, 그중 ‘이혼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태도’는 쓰나미급 충격이었다. 미국은 이혼에 ‘쿨’하다고 듣긴 했지만 실제 여러 사람을 만나보니 상상이상으로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걸 처음 깨닫게 해 준 사람은 같은 반 학부모였던 아리아나 엄마였다.
아리아나 엄마는 도저히 애 엄마라고 믿기지 않는, 비현실적으로 가는 허리와 긴 팔다리를 지닌 금발 미녀였다. 푸근하고 네모진 체형의 미국 엄마들 사이에서 혼자만 할리우드 화보를 찍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감탄하며 흘끔거렸다. (남자들이 왜 이쁜 여자를 보고 정신 줄을 놓는지 이해합니다)
하루는 교실 앞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평소에 눈인사만 했고, 친한 사이도 아니라 가벼운 주제들이 오갔다. 학교 얘기, 애들 얘기, 음식 얘기... 그렇게 수다가 마무리될 즈음 그녀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우리 딸 다음 주에 전학 가. 내가 남자 친구랑 결혼을 하게 됐거든.”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원래 리스닝 실력이 좋지 않습니다) 처음 대화하는 같은 반 엄마한테 남자친구 얘기도 모자라 재혼 얘기까지 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녀의 재혼은 사실이었고 내 영어 듣기 능력은 정상이었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전 남편, 즉 아리아나 친부의 근황 소식도 알려 주었다. (아리아나 아빠는 운동선수였다. 모델 같은 여자와 근육질 운동맨과의 만남이었구나!!)
그렇다면 나는 뭐라고 대꾸해 줘야 하나. "어머나~ 재혼 축하해요.", “오, 남친 있었구나. 부럽다!!” 무슨 말을 떠올려도 어색해서 말문이 막혔다.
눈인사만 하던 사이에 나눈 대화 치곤 주제가 찐하다. ‘재혼’과 ‘전 남편’이라니. 한국 아지매는 어질어질했다. 한국이라면 전학 가는 마당에 친하지도 않은 엄마한테 그런 고백을 할 리가 없다.
그녀를 통해 이혼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시선이 한국과 ‘매우 다름’을 처음으로 느꼈다. 역시 할리우드의 나라네. 아~주 개방적이야.
비슷한 일은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 다녔던 미국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공부 시작 첫날. 각 그룹의 리더들이 앞에 나와 자기소개를 하는데, 한 리더의 말에 나는 또 입이 벌어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A조 리더 파트리샤 구요. 아이가 둘 있어요. 최근에 이혼했고요.”
성경 공부 리더가,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혼 고백을 하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유일한 한국 아지매인 나만 이렇게 충격받았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룹에서 조원들과 어느 정도 정이 쌓이다가 이혼 얘기가 나왔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성경 공부 리더가, 굳이 자기소개 중에 이혼 얘기를 꺼낸다고? 내가 이상한 건가. 개방적인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에 있으니 극 보수주의자가 된 기분이다.
파트리샤는 특이하거나 용감한 게 아니었다. 미국에서 이혼 여부를 밝히는 건 ‘나 애가 셋이요.’라고 말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미국 엄마들은 자기소개할 때 대부분 ‘이름, 자녀 수, 자녀가 몇 학년인지’를 기본으로 밝히는데(남편 얘기는 안 함), 싱글 맘들은 이때 자연스레 이혼 사실을 덧붙였다. 파트리샤는 아주 평범한 자기소개를 한 것이다.
마지막 사건은 아들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일어났다.
미국은 아이들 생일 파티 규모가 큰 편이라 아이 친구들뿐 아니라 이웃이나 친척까지 초대해 파티를 여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다 보니 엄마들도 초대받을 때가 있는데, 하루는 아들의 반 친구 브라이언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아들과 함께 집 입구에 들어서자 브라이언의 부모와 친척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웃으며 한 사람씩 나와 악수를 건넸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자기소개,
남자 1: 안녕? 만나서 반가워요. 난 브라이언의 아빠예요.
여자 1: 나는 브라이언의 새엄마예요.
여자 2: 반가워요, 나는 브라이언의 친엄마예요.
아들의 생일 파티에, 학교 친구들과 엄마들을 초대해서, 친엄마, 새엄마, 아빠가 정답게 모여 인사를 한다!
한국도 요새는 이혼에 관해 열어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들도 이혼 사실을 당당히 고백하고, 방송국은 이혼을 소재로 예능 프로를 만든다. 돌싱들의 연예를 다룬 프로그램은 한동안 뜨거웠고 브런치에도 이혼을 다룬 책들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내 주변에도 이혼한 친구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이혼했음에도 그들은 이혼 후 직장을 옮기거나, 친구 관계를 정리하거나, 멀리 이사를 갔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숨어버렸다. 타인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 시선과 과한 오지랖, 가십들 때문이었다.
문득 궁금하다. 한국에서 생일 파티 때 아빠, 새엄마, 친엄마가 나란히 서서 자기소개하는 날이 언제쯤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