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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사람 Dec 20. 2023

20평에 사는 즐거움

30평에서 20평으로 이사 온 세 가족 이야기 입니다.

<30평 아파트에 살어리랏다>


아이가 세 살 무렵일 때까지, 우리는 지방 소도시의 스무 평짜리 주공아파트에 살았었다.

아이가 걷고 뛰고 뒹굴면서 아이 짐이 쌓여가자 우리는 '큰 집'에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인스타 속 사람들은 깔끔한 인테리어의 40평대에 살고 tv 속 연예인들도 50평은 기본이니 거기에 비하면 우리 집은 소라 껍데기처럼 느껴졌다. 쓸데없는 비교질을 해댄 걸 보니 이때는 특별히 자존감이 낮았었나보다. 


그렇게 나는 매일 수도권 일대의 아파트 시세를 검색하며 싸고, 넓은 집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아이가 네 살일 때 처음으로 서른 두 평의 나홀로 아파트에 입성하게 되었다.

전세였다. 


식탁에서 씽크대까지 거리가 멀어졌다는 걸 깨달은 남편과 나는 마주보고 피식 웃었다. (이후에는 서로 갖고와라 갖다놔라 미루며 티격태격의 원인이 되었지만)

아이는 넓어진 거실에 온몸을 박아대며 (기적적으로 아랫집엔 몇 년 간 아무도 살지 않았)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그 집이 모두 좋지는 않았다. 30년을 바라보는 구축이라 샷시가 휘어서 창문이 야무지게 닫히지 않았고 베란다가 없이 트여있어서 겨울에는 산바람이 그대로 치고 들어왔다. 보일러를 켜도 집 안에 훈기가 남지 않아 11월부터 경량패딩을 입어야 했다. 겨울에 집에 들어서면 뼈마디가 서늘했다. 그래도 거실이 넓어 지인들 모임은 늘 우리집에서 치러졌다.


"셋이 이렇게 넓은 데 산다고?"

고만고만한 살림살이인 지인들은 우리 집 대궐처럼 켜세웠다.


"00이 집이 넓으니까 거기서 노는게 제일 재밌어!"

아이 친구들이 거의 매일 드나들며 난리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4년을 지내고서 전세가 최고점을 찍은 때에 우리는 나와야 했다. 집 주인이 인테리어를 싹해서 집을 내놓겠다고 했다. 안일한 것인지, 4년 간 내 손 안 간 곳이 없는 그 오래된 늙은 집을, 나는 내 집이 아니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래, 더 좋은 집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더 새집, 더 좋은 집으로 가즈아! 아이 학교 입학을 세 달 앞둔 11월에 우리는 서로의 직장과 멀지 않으면서, 학원도 형성되어 있고, 집 상태도 나쁘지 않은데다가, 비싸지 않은 집을 찾느라 바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는 집값이 최고점을 찍을 때였다. 그럼에도 아이를 돌리기 위해 학교가 가깝고 상가에 학원이 많이 들어찬 '아파트'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 서른 군데의 집을 본 이후였던가. 퇴근 후 피로했던 우리는 어둑한 밤길을 달려 옆옆 동네의 아파트 단지 30평대 집을 보았고, 그 자리에서 전세 가계약금을 걸었다. 지하철역에서는 멀어도 집이 참 번듯해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다. 


브랜드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깔끔한 벽지와 세련된 느낌의 조명이 대한민국 평균 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 그래, 맞아. 이게 내가 생각하던 아파트였어. 


이 단지에는 20평대부터 40평대까지 1천 세대가 넘는 집들이 있었으나 우리는 서로 따져보지도 않고 당연히 30평대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나는 소득이 좀 있는 편이어서 이자 정도는 부담스럽지 않다고 판단했고, 이 동네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를 위해서도 20평대보다는 30평이 낫다고 여겼었다. 


다른 친구들이 3, 40평에 사는데 20평에 살면 부끄럽지 않을까? 30평에 살다가 집을 줄여서 들어가면 아이가 실망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우리 삶이 실패했다고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아니, 다시 솔직한 심정으로 돌아보면 나는 그저 집으로 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넓은 아파트에 사는 나, 능력있는 나를 지키고 싶었던 거였다.  


그렇게 나는 84제곱미터의 '국평' 아파트에 어거지로 입성했다.  

내 불안과 모순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나는 집을 더 넓고 쾌적하게 보여야 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30평대 인테리어를 본 날은 지금보다 더 고급스러운 가구를 눈이 빠지게 검색했고, 계절마다 베란다의 꽃과 나무를 바꾸느라 많은 돈을 쓰기도 했다. 그림같이 보여야 할 실 어딘가에 아이가 장난감을 흘려놓으면 잔소리를 해대며 줍고 다니느라 예민해졌다. 누가 CCTV로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다가 40평대 이웃집에 들렀다 온 날이면 그동안 내가 모시고 살던 이 집이 작고 초라해 보이는 위화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런 날은 한갓진 데 있는 50평대 단독주택이라도 사고 싶다며, 이 넓은 마당에서는 뭐든 할 수 있겠다며 남편을 졸라댔다. '평수'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집을.. 집을 줄여야 한다니...!!>


집은 나쁘지 않았다. 지하철역에서 30분을 걸어와야 하는 것도, 집값이 1g이라도 떨어지면 난리가 나는 동네 분위기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매달 늘어나는 이자는 우리를 절망에 빠뜨렸다. 남편과 내가 하는 일도 내리막길에 들어서 이 집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치였다. 일이 잘 될 때 늘어난 소비는 다시 줄이기 힘들었다. 철마다 여행도 가야했고, 맛집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 옷 브랜드도 학원도 줄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일을 늘이면 서로 예민해져 다툼도 잦아졌다. 우리 수입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이자를 질식하지 않으려면 저렴한 집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은 예정된 결론이었다. 


그렇게 뒤늦게서야 나는 집이 쓸데없이 넓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사를 마음 먹고 20평대 중에서도 가장 저렴하게 나온 집 이상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절망의 깊이가 더 깊어졌다. 다음 집은 40평이나 50평일 줄 알았던 내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지. 집을 줄여가면 상실감이 크다는 말이 가슴을 후볐다.


그 와중에도 미약한 나는 '집이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시끄러우면 어쩌지... 집이 좁아져서 아이가 답답해 하면 어쩌지...' 하고 고민했다. 부동산들이 왜 30평대를 안 보느냐고 물으면 "20평에 네 식구도 살잖아요? 놀러가보니까 아담한 게 좋더라구요. 여기가 위치도 낫구"라며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부동산과 함께 지금 집을 딱 한 번 밖에 못 보고 이사를 준비해야 했기에 이삿짐을 풀었는데 가구가 다 들어가지 않아 동동거리는 상상에 시달리며 폐기물 자루를 10 포대 넘게 버렸다. 한번 버리는 게 어렵지 버리기 시작하니 쓸데없이 쌓아놓고 산 물건이 많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온 집안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아, 다시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누구니? 누가 20평 좁다고 했어?>


마침내 이삿날. 이삿짐 센터 전문가들은 공간의 마술사처럼 모든 짐을 하나의 낙오없이 방 세 칸과 작은 베란다에 착착착 배열하는 것을 보면서 내 걱정이 기우였음에 우선 안도했다. 불필요한 공간없이 동선에 맞게 가구를 놓고 보니 살림이 조화롭고 짜임새 있게 보였다. 나쁘지 않은데? 


거실의 주인공처럼 버티고 있던 거실장과 쓰지도 않던 킹사이즈 침대, 아이 장난감들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히 주위에 나눠준 것도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바닥청소까지 마무리 되자, 나는 쇼파에 앉아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전입신고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과 나는 이전 세입자가 두고 간 작은 아일랜드 식탁에 마주앉아 동시에 입을 열었다.


".. 좋다.."


집은 아늑했고, 정갈했고, 무엇보다 포근했다. 이 집이 내 등을 감싸주는 기분이었다.

'이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집 앞에 길이 있다니. 너무 좋아! 우리 집 옆에 집이 이렇게 많은 것도 너무 좋아! 내 방이 더 아늑해져서 좋아! 거실에서도 엄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아!"


이곳에 들어와보니 알 수 있었다. 이전의 내가 집을 건사하느라 얼마나 피로했었는지.

사소한 예로, 밥을 먹다가도 바로 뒤에 싱크대와 냉장고가 있으니 일하기 좋았고, 집 안 여기저기 물건이 흩어져 있어도 금방금방 치울 수 있어 몸이 편안했다.


그날 저녁 짜장면과 탕수육 세트를 함께 먹은 우리는 안방에 나란히 누워 오랜만에 깊이 잠이 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아이의 친구들이 여럿 살고 있어서 엘리베이터에서도, 복도에서도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정겨웠다.


그 이후로 이사를 잘 마쳤느냐고, 몇 달동안 고생이 많았었다고 안부를 묻는 지인들에게 나는 반색했다.


"30평대 전세에서 20평대 전세로 이사했어. 이사하고 보니까 이 집을 진작에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워. 처음부터 이 집에 살았더라면 우린 더 여유로웠을 텐데" 


"30평대 전세에서 20평대 전세로 이사했어. 이사하고 보니까 이 집을 진작에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워. 처음부터 이 집에 살았더라면 우린 더 여유로웠을 텐데" 



<작은 집이 주는 즐거움, 그리고 안정감>


집은 삶의 토대라고 한다. 

그러니 삶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짐이고 

삶에 안정감을 주고 사람을 쉬게 하는 곳이 바로 집이어야 한다. 

그것을 일찍이 깨달았다면 우리는 조금 더 편안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엄마 말씀으론 누구에게나 맞는 집이 있다 한다.

누군가는 넓고 트인 집이, 또 누군가는 소담한 흙집이, 어떤 누군가는 시내 한 가운데의 어떤 집이 어울린다는 뜻이다. 그것을 나는 마흔이 넘어서 깨달았다.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나는 집 뿐 아니라 내 삶 전체를 다시 세팅하는 기분을 맞았으니 결혼 이후 네 번의 이사로 찾은 이곳이 나의 '인생집'이라 할 만했다.


이곳에서 나는 도량에 걸맞지 않은 공간에 불필요한 물건을 채우며 건사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 장소에 두어 필요한 때에 쓰는 삶을 찾을 수 있었다.


감히 미니멀라이프까지는 아니라도, 지난 몇 달은 내 삶의 찌꺼기를 덜어내고 묵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는 시간들이었다. 옷이든 음식이든 소품이든, 이것저것 사들이고 쌓아두는 습관을 이 집에서 갈아치우게 된 것도 반가운 일이다. 


크리스마스면 큰 트리를 장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 집에서는 8천원 짜리 작은 소품과 전구로도 얼마든지 멋있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머리를 쓸 줄 알게 되었다. 음식은 쟁여두는 맛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냉장고부터 열어보며 레시피를 상상할 줄 알게 되었다. 손님 눈에 비춰질 집 꾸미기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었던 내가 우리 가족을 안아주는 집다운 집에 고마워할 수 있게 되었다.


공간이 주는 힘은 이리 큰 것일까. 

내 머리 속의 묵은 생각들, 정리되지 못했던 갈등과 갈망들이 담백하고 정갈해지는 경험이 참으로 신선했다.


자연히, 남편과 나는 앞으로 이 이상 집을 넓힐 생각이 없게 되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먹고, 자고, 도란도란 놀면서 세 식구 살갑게 지내기에 이만한 공간은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나에게 가당치 않게 큰 주택이라도 샀더라면, 그 감당을 어찌 했을지 아찔하다. 이자 내느라 잠자는 시간 빼고는 일에 매달려야 했던 내가 이제는 브런치를 두드리며 건강을 관리하고 있는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 


물이 얼어붙어서 세탁기 사용을 지양해달라는 방송이 계속 나온다.

손빨래 해서 거실에 널어놓으면 집안이 금세 촉촉해질 거다.

아이가 오기 전에 고구마를 쪄야지. 


나는 지금, 작은 집이 주는 행복에 감사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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