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창경원
고대하던 소풍날 아침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우천 시에는 소풍이 연기가 된다고 예고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나는 대단히 심사가 틀어졌다. 학교를 안 갔다. 한숨이 나오고 답답했다. 누나는 학교를 갔을 것이다. 지금 기억엔 집에 엄마하고 나하고 둘만 남았다. 하지만 계산해 보면 돌이 지나지 않은 동생이 있어야 옳다. 아마 집안일을 돌봐주는 누나가 봐주고 있었겠지. 기억이란 게 이렇게 부분만 뽑아서 재구성을 하기도 하니 완전히 믿을 건 못된다.
나는 엄마의 관심을 모을 때까지 혼자서 계속 찡찡거렸다. 아이참, 흥흥. 왜 그래 소풍은 안 가는 거 아니잖아. 날 좋을 때 가잖아. 에이 몰라. 김밥 먹을까? 싫어. 그럼 어떻게 할까? 모른다니까. 비가 와서 소풍을 못 갔다고 심통이 난 아들을 달래다가 어머니도 약간 짜증이 나셨을 것이다. 얘, 내가 비를 오라 그랬니 어쨌니, 왜 엄마한테 그래. 어린 나이에 생각해도 맞는 말이지만 괜히 화가 치솟고 이유 없이 억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금세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얘, 우리 소풍 가서 밥 먹을까? 어떻게? 잠시 울음을 멈추고 물었다. 산에 가는 것처럼 장독대에 올라가서 먹으면 되지. 비 오잖아. 우산 쓰고 우비 입고 장화 신고 장독대에 가서 소풍가방 풀고 엄마랑 재미있게 밥 먹고 내려오자. 안 해본 걸 한다는 게 새롭기도 하고 어차피 대책이 없이 떼를 쓸 때는 이쪽도 퇴로가 열리면 그리 가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응, 하고 대답을 했다.
어머니는 내 눈물을 씻겨주신 뒤 우비를 입히고 소풍 배낭을 메워주셨다. 우산을 들고 모자가 함께 장독대에 올라갔다.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해해하고 웃었다. 어머니는 내 기분을 어떻게 맞춰주면 되는지를 잘 알고 계셨다. 소풍가방을 풀고 김밥을 꺼내고 물통을 꺼낸 뒤 내 손에 양갱을 하나 쥐어주시고 말씀하셨다. 자, 이제 옷도 젖고 감기 들면 안 되니까 내려가서 먹을까? 그늘을 찾아간다고 생각하고 마루로 가서 먹자. 나는 이미 착한 아이가 되어 응, 하고 즉각 대답을 했다.
어머니는 훌륭한 교육자셨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는 옛날에 배웠다는 어머니 제자들이 자주 찾아왔다. 내 눈에는 어머니하고 별반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와서 선생님 선생님 하는 게 신기했고 영원히 어른이었던 것 같았던 그들의 어린 시절 추억담이 딴 세상 이야기 같아서 신기했다. 이 사제관계는 꽤나 오래 이어졌는데 나는 어려선 그분들이 늘 빠지지 않고 뭔가 사 오는 게 반가웠고, 커서는 엄마가 처녀시절에 제자들이 따르는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삼우제를 지내고서 형제들이 어머니의 추억담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형과 누나의 기억에는 어머니가 인자하시면서도 엄할 때는 엄하셨던 분이었다. 글씨를 너무 성의 없이 썼다고 노트를 찢기기도 했고, 몰래 빌려온 만화책을 찢겨서 낭패를 보기도 했다고 했다. 나는 금시초문이라 엄마가 그렇게 무서웠어하고 물었는데, 모든 형제들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하여간 엄마가 너한테만은 특별했어,였다. 이건 워낙 많이 겪어서 나도 생각이 난다. 특히 누나가 그렇게 키우면 버릇 나빠져요, 성질 나빠져요라고 할 때마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너 시집가서 아들 낳아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키워. 내 아들은 내가 내 맘대로 키울 테니까' 그때마다 나는 혓바닥을 메롱하고 내밀었다. 누이는 그때마다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산으로 소풍을 가서 그늘을 찾는 상상을 하며 미끄러운 장독대에서 조심스레 내려온 우리는 마루로 들어왔고, 나는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위의 그림은 그 날의 이미지를 붓펜 하고 색연필로 대충 그려본 것이다. 내가 빨간 장화를 신었고 노란 우비를 입었던 것은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비 오는 그날 어떤 복장을 하셨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그냥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려본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는 한복을 주로 입으셨고, 그 이후에는 평소 양장을 입으시다가 무슨 날이면 한복을 입으셨던 것 같다. 고등학교 이후의 기억은 늘 양장이셨다.
밥을 즐겁게 다 먹고 나서 내가 뻔뻔한 건지, 애들이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살살 엄마와의 약속을 위반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과자 몇 개 먹어?
아까 얘기했잖아, 요깡 하나만 먹기로. 그대로 뒀다가 소풍 가져 가야지.
다른 거 두 개만 더 먹으면 안 돼?
그럼 딱 하나만 더 먹어라. 그 대신 그 이상 더 먹으면 소풍 갈 때 다시 안 사준다.
응, 알았어, 엄마
그 당시 소풍을 가는 날 비가 오면 부모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차질이 왔다. 우선 김밥을 두 번이나 싸야 했고 특히 과자를 두 번 마련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살림에 소풍에 가져갈 과자를 두 번이나 장만하는 건 웬만한 집의 가계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든 집에서 소풍 배낭을 봉인하듯 그대로 모셔놓거나 했는데 이게 눈앞의 유혹에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한테 통할 일인가. 야금야금 빼먹고 혼이 난 뒤 다시 채우거나 벌로 홀쭉해진 가방을 그대로 가져가거나, 집마다 작은 파란이 일었다. 나 역시 눈앞에 어른거리는 과자의 유혹에 빠져서 벽장 속의 소풍 배낭에 야금야금 손을 대었고 나중에 누나한테 혼난 기억이 남아있다. 그 해는 날씨 탓이었는지 또 한 번 연기가 되어서 정작 소풍날에 옥수수를 튀긴 강냉이만 가득 채워 넣고 온 아이도 있었다.
소풍 갈 때 가져가는 도시락에 관해서 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게 있다. 아이들이란 원래 짐 같은 걸 가지고 다니길 싫어하는 법이다. 우산도 그렇고 장갑도 그렇고 다 자주 잃어버리는 물건들이다. 그런데 이게 또 잃어버리면 혼나는 것들이라 웬만하면 처음부터 가지고 다니길 꺼려하고 그랬다. 소풍을 갈 때는 과자는 다 먹어버리면 되고, 도시락도 다 먹으면 버리고 오는 일회용이 편했다. 그러니까 빈 가방에 수통만 들고 집으로 가는 게 정석이려니 했다.
요즘 흔하디 흔한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 용기가 나오기 훨씬 전이어서, 일회용 용기란 게 별로 없었는데 유독 소풍 때만은 다들 이걸 사용하였다. 나무로 만든 도시락이었다. 대패로 민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주아주 얇게 켜낸 나무를 종이로 풀칠해서 이어 입체로 펼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조악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니 상관하지 않았다.
소풍을 다녀오고 얼마 있어서인지 아니면 가을이었는지 애매한데, 어느 날 우리 식구가 다 같이 창경원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지금은 창경궁이라는 고궁으로 복원이 되었지만 당시는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동물원을 겸하고 있어서 아이들한테 대단히 인기가 높은 곳이었다. 하기야 그때는 서울구경이라고 해도 달리 갈만한 곳이 많지 않아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도 창경원은 서울구경의 상징 같은 장소였다. 그 날 같이 간 일행 중에는 우리 식구에 더하여 두 명이 더 있었다.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는 누나하고 친척 아저씨 한 명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늘 집에서 일만 하던 가정부 누나에게도 창경원 나들이는 큰 이벤트였을 것이다.
또 한 명의 친척이란 해병대에서 복무를 하다가 휴가를 나온 병일이 아저씨였다.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니 나에게는 외종숙에 해당하는 분이다. 당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작은 외할아버지가 무능하여 젊어서부터 고생도 참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늘 낙천적이었고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사람을 잘 웃겨서 우리 형제들이 많이 좋아했다. 제대하고 우리 집에 기거하던 적도 있었는데 어머니의 알선으로 큰 병원의 약리연구실에 취직을 하였다. 직장에서 연분을 만나 결혼을 한 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LA로 이민을 떠났다. 노래 '나성에 가면'이 유행을 하기 전이었으니까 아마 이민 붐이 불던 초기였을 것이다. 떠나기 전 부인을 동반하고 집으로 인사를 왔던 생각이 난다. '누님, 전 이젠 부모형제도 없고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이 땅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요. 거기 가서 열심히 살아볼게요.' 그리고는 정말 소식이 끊겼다. 지금 7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가 되셨을 텐데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동물구경을 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도시락 보따리를 풀면서부터 내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가지고 간 도시락 보자기를 풀자 칠기로 만든 삼단 찬합이 의젓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래는 검색에서 찾은 이미지인데 내 기억 속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삼단으로 구성돼 찬합을 펼치면 알록달록 가지가지 음식이 담겨있었다. 맛있는 음식의 향기와 칠기의 냄새가 함께 어울려 좋은 날의 즐거운 이미지가 중첩이 되어있어서 지금도 나는 깨끗이 씻은 찬합의 안에서 풍겨 나오는 칠기 고유의 냄새를 좋아한다.
그 당시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이 칠기 찬합이란 게 일제 잔재라는 걸 알고는 나의 유년시절의 이곳저곳에 박힌 다른 일본문화의 조각들과 함께 나를 서글프게 할 때도 있었다. 먼 훗날 일본에 가서 옻칠장인 전용복 선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분이 일본에서 얼마나 존경받는 인물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그분께서 직접 본인이 작업한 메구로 가죠엔(아서원)을 안내하고 설명해 주시며 조선의 칠기가 일본보다 뛰어나다고 하셔서 나의 상했던 자존심은 얼마간 회복되었다. 참고로 이 가죠엔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건물의 모델이 된 걸로도 유명하다(관심 있으신 분들은 '目黒 雅叙園 千と千尋の神隠し'로 검색하여 보면 자료들이 나온다).
우리들은 김밥, 유부초밥, 갖가지 요리들을 맛있게 먹으며 창경원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지금 내 기억에는 김밥, 유부초밥 말고는 다른 음식이 뭐가 있었는지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같은 찬합에 음식을 싸서 갔는데 메뉴가 생생하게 생각나는 건 나중에 형이 알오티씨 훈련을 받으러 수색 30사단에 들어간 여름 면회를 갔을 때였다. 김밥은 없이 유부초밥만 싸고 대신 불고기, 갈비찜, 통닭 등 고기반찬이 많았다. 새카맣게 그을려서 이빨만 하얗게 보이는 형을 만났는데 기대했던 것만큼 와구와구 먹지 않아 좀 더 잘 먹어주었으면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형편도 어렵게 살던 때여서 뭔가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도시락을 싼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식구들이 모여서 산으로 들로 나간다는 게 참 소중한 기회였다. 그만큼 단조로운 일상을 살던 시절이었다. 시골에서 가을에 국민학교 운동회를 하면 모든 마을이 모여서 그날 하루 그 행사를 큰 축제로 즐겼다. 내가 시골에 내려갔을 때 운동회를 구경 갔다가 땡볕에 피곤하기도 하고 시들해져서 혼자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마을은 아무도 없었고 말 그대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따가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이른 오후 아주 멀리 남의 집 외양간에서 소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 파리가 두어 마리 날아다니는 소리, 어디선가 낮잠을 자는 돼지가 꿀꿀하고 잠꼬대하는 소리. 이런 게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런 조그만 잡음이 이따금씩 고요를 깨는 순간 말고는 귓전에 계속해서 찌잉하는 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일곱 살 먹은 나는 텅 빈 집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마당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경험을 하였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도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엄마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뒤란 굴뚝 옆에 숨어서 훌쩍거리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