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와 무로 쌓은 산더미 속에서
해마다 이맘때가 김장철이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니 공기 속에서 겨울의 내음이 난다. 그리고 마음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김장을 하는 날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대문을 열면서부터 집전체에 싸한 냄새가 돌았다. 마루에 올라서면 김치 담근 냄새가 코뿐이 아니라 눈에도 와 닿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도 곳곳에 배어있던 마늘의 아린 성분이 각막을 자극하였던 것일 게다. 파와 무도 채를 썰고 갈고 하면 아릿한 휘발성 기체가 나온다. 고추도 재채기가 나오는 매운 냄새가 있으니 이런 향신채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김장날엔 집안에 한동안 이런 모든 냄새가 범벅이 되어 곳곳에 배어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싫지가 않았다. 그때는 참 많이도 했다. 백 포기는 보통이고 좀 산다는 집은 이백 포기 삼백 포기 이렇게 했다.
지금은 사어 비슷하게 되어버렸지만 '월동준비'라는 말이 있었다. 말 그대로 겨울을 날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단풍과 낙엽의 낭만도 잠깐이고 어른들에게는 이내 겨울맞이가 걱정으로 다가왔다. 신문에도 월동준비를 위한 기사가 매일 실렸다. 수도나 펌프가 얼지 않도록 파이프를 싸매 둘 것, 외풍이 심한 집은 비닐을 바르고 문풍지를 새로 대고 등등 한파를 피하는 요령 같은 게 눈에 띄었다. 스티로폼 같은 것도 없어서 헌 담요 같은 걸 수도 파이프에 두르던 시절이었다. 집장사들이 날림으로 지은 집들이라 방한도 매우 엉성했고 수도도 낮게 묻혀서 추운 날이면 얼고 또 그래서 터지곤 했다. 더 심각한 건 연탄가스 중독이어서 해마다 겨울이면 인명피해가 많이 났다. 사고에 대비해서 연기 나는 걸 아궁이에 때서 틈이 벌어진 구들과 장판을 보수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월동준비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김장 담그기였다. 그때는 겨울이 오기 전에 김장을 수백 포기 넉넉하게 하고, 연탄을 수백 장 광에 들여 쌓아 놓은 집은 걱정이 없겠다고 부러워하는 집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집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누구네는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김장을 제때 못하고 쩔쩔매다가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땅이 얼어서 김장독을 파기가 어려웠네 이런 이야기도 흔하게 들렸다.
지금은 담근다는 동사를 더 많이 쓰지만 그때는 김장은 '하다'라는 동사를 썼다. 김치도 담그고 깍두기도 담그고 오이소박이도 담근다고 하는 건 지금이나 그 때나 마찬가지지만 김장은 '한다'는 말을 썼다. 김장날 잡았나요. 네 우리는 다음 주에 해요. 몇 포기 하세요. 그냥 작년만큼 하려고요. 이런 대화들이 친지나 이웃 간에 오갔다. 통배추를 백 포기 이상 하루에 담그는 작업은 많은 일손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웃, 동창들이 돌아가며 품앗이를 하는 게 풍습이었다. 주부들이 여럿 모여 절인 배추와, 무채와 각종 젓갈과 고춧가루, 다진 마늘, 파 등을 그야말로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김장을 하는 광경은 아이들이 보기에도 푸근하고 넉넉했다.
일을 도와주러 온 손님들에게 점심을 대접해야 하니 어느 집이나 김장날은 평상시와 달리 맛있는 음식을 더 마련하였고, 주부들은 즐겁게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맛있게 먹으며 김장을 하였다. 대개 작업은 오후 늦기 전에 끝났다. 다들 또 각자 집에 돌아가서 자기네 저녁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저녁에 집에 돌아온 식구들도 김장을 한 날 저녁은 참으로 푸짐하고 맛있게 먹었다. 평소보다 많이 장만한 음식에 더해 오늘 담근 생김치나 배추 사이에 넣고 남은 김치 속을 여분으로 마련한 생굴과 함께 맛보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였다.
내가 어렸을 때 김장철이 되면 평소보다 엄청난 양의 배추와 무가 대도시로 올라오는 걸 재래시장에서 다룰 공간이 없어서 동네마다 공터나 이런 곳에 임시로 김장 시장이 열렸다. 공터를 가득 메운 배추와 무의 산더미에서 풍기는 풋풋한 야채 냄새가 진동하는 김장시장에는 흥분한 아이들도 괜히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이들이란 일상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면 흥분하는 법이니까. 주부들이 와서 배추와 무를 구입하면 지게와 리어카 등으로 그걸 날라주는 짐꾼들이 따로 있었다. 저녁 전에 파장할 무렵이면 떼어낸 초록색 배추 겉 이파리와 무청 등이 길바닥에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그걸 닭 모이로 쓰고 토끼 먹이로 쓴다고 모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서울에도 닭을 키우고 메추리, 토끼를 키운 집이 제법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서울에도 김장철이면 소달구지, 마차가 흔하게 눈에 띄었다. 마차를 끄는 건 말보다는 다리가 굵은 노새가 많았다. 말이나 소가 짐을 부리는 동안 눈을 껌뻑이며 서있었는데 참 똥도 많이 쌌던 게 기억에 남는다. 농촌의 아이들하고 달리 그래도 서울서 산다고 그게 신기했던지 아이들은 둘러서서 야, 저기 또 똥 싼다, 뿌지직뿌지직 참 많이도 싼다, 낄낄거리며 구경을 했다.
그때는 건축붐이어서 내가 살던 부근의 정릉천에서는 개천 모래를 파서 시멘트를 약간 섞어 벽돌을 많이 찍어냈는데 이것도 마차가 많이 날랐던 것 같다. 흔하게 보이던 소달구지와 마차가 소리 소문 없이 도시의 풍경에서 사라져 버리고, 툭하고 건드리면 뒤집어질 것 같은 조그만 삼륜자동차가 나와서 용달 업무를 대체하였다. 용달차라고 불리던 이 삼륜차는 오토바이 소리를 내며 시내를 누비고 다녔는데, 내가 현장을 목격한 적은 없지만 실제로 자주 엎어지기도 하였다고 들었다. 서울역, 청량리역, 마장동 이런 데서 화주를 기다리던 지게꾼들도 이즈음 자취를 감춘 게 아닌가 싶다.
위의 흑백사진 세장은 국가기록원 홈피에 공개한 사진을 캡처한 것인데 내가 어렸을 때 서울에서도 김장철이면 흔하게 보던 풍경이다. 미국 LA나 뉴욕에서는 50년대 60년대 영화를 찍을라치면 그냥 길에 다니는 자동차만 바꾸면 그대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될 법한 곳이 곳곳에 많고, 파리 런던은 더욱 그렇다. 위의 사진을 보니 거기에 비하면 참 한국인들만큼 변화무쌍한 세월을 살아낸 민족도 드물지 않나 새삼 감회가 새롭다.
김장하는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어려서 고향 속초에서 김장하는 것도 볼 기회가 있었다. 배추를 절이는 작업을 바닷물에서 했다. 소금물에 담그는 게 아니라 집집마다 소달구지에 배추를 잔뜩 싣고 바닷가로 향했다. 소금 살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그랬던 것 같다.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주부들은 돌아올 때 동이를 머리에 이고 바닷물을 담아오곤 했다. 응고제로 간수를 내는데 돈을 아끼려고 바닷물을 길어다 썼던 것이다. 손쉽게 화학약품을 쓰다가 다시 요새는 바닷물을 써서 만드는 두부가 명품 두부 취급을 받으니 세상은 돌고 돈다. 그때 부업으로 두부를 만들어 팔던 마을에서 몇 집이 남아서 지금 학사평의 순두부마을이 되었다. 아무튼 나는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김장을 다 먹어보았는데 솔직히 이야기해서 아무래도 도회지에 사는 조금이라도 살림이 넉넉한 집들의 김장이 가난한 농촌의 그것보다는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요즘 TV를 보면 무슨무슨 부녀회 같은 단체의 봉사활동으로 대량으로 김치를 담그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깨끗하고 위생적인 시설에서 김치를 만드는 김치공장의 모습도 나오곤 한다. 내가 이 모습을 보면서 제일 눈에 띄는 게 모든 사람의 두 팔에 착용된 빨간 고무장갑이다. 옛날엔 그런 게 없었다. 배추를 절이고, 속을 버무리고, 무채를 썰고, 속을 버무리고, 그걸 배추 사이에 넣고 하는 작업을 다 맨손으로 했다. 어릴 적에 엄마 옆에서 잠을 청하는데 김치를 담근 날이 이면 불그레 물이 든 어머니의 손길에서 맵고 알싸한 양념 냄새가 났던 기억이 남아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국민 여배우'라 해도 당연할 한국 최고의 미녀로 통하던 김지미 씨가 열 살 연하의 젊은 가수 나훈아와 결혼을 하여 엄청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대전 어딘가에서 살림을 차리고 동거를 하다가 언론에 포착이 되어 특종 거리가 되었는데 나도 당일 그 기사를 보았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내용이 김지미가 김치도 직접 담그는데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담근다는 대목이었다. 그건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그 예쁜 여배우 김지미가 보통사람처럼 김치도 담가먹고 살림도 잘하는구나,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서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김치를 담근다니 진짜 사랑하는 사인가 보다 등등. 자칫 잘못하면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두 사람의 관계는 아마 이 감동적인 '맨손 김치' 이야기가 있어서 세간의 축복을 받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아마도 당시는 고무장갑이 보급되기 시작한 무렵이어서, 고무장갑을 끼고 하는 작업에 대한 위화감이나 불신이 좀 남아있었기에 김치는 역시 맨 손으로 담가야 제맛이 나온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고무장갑이 보급될 무렵을 전후하여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한 게 뻘건 고무대야다. 지금은 그게 없으면 한국의 모든 식당은 가동이 중지될 것이다. 주방을 들여다보면 배추도 절이고, 식재료도 담고, 비눗물을 풀어놓고 씻을 그릇을 담가놓기도 하고 별별 용도로 다 쓰인다. 그런데 지금 보아도 여전히 정이 가는 모습이나 색깔은 아니다. 옛날에는 나무로 만든 함지박을 썼다. 몇 년 전 뉴욕의 어느 서양 레스토랑에 갔는데 함지박을 멋들어지게 인테리어 가구로 장식해 놓은 걸 보았다.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 과도기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함지박을 고무대야와 바꿔서 나중에 그걸 외국에 안티크로 팔아 크게 한몫 잡았다는 도시전설이 있는데 사실여부는 모르겠다.
그즈음 바가지도 슬슬 고무 바가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 지붕개량사업으로 초가지붕이 없어져서 박을 키우지 못해 바가지 생산이 끊겼는지, 고무 바가지가 보급이 되어 진짜 바가지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머리를 내리치는 거 말고는 수요가 없어져서 박을 안 키우게 되었는지, 사실여부는 알 수가 없는데 어쨌거나 지금은 그 고무 바가지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쌀에 돌이 들어있지 않으니 조리도 사라져 버렸고 참 없어져 버린 게 많기는 많다.
김장을 할 때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마당이나 뒤란에 땅을 파고 김칫독을 묻는 일이 그것이다. 김장독을 묻고 거기에 김치를 차곡차곡 넣은 뒤 커다란 돌멩이를 씻어서 눌러놓고 항아리 뚜껑을 덮고는 그위에 가마니를 덮어놓으면 익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는다. 김장독을 여러 개 묻으면 꺼내먹는 순서에 따라 소금을 더해서 염도를 좀 달리했던 것도 같은데 어릴 적에 구경만 했으니 자세하게는 알 길이 없다.
난동(暖冬)이라고 해서 겨울이 유난히 푸근한 해는 김장김치가 빨리 시어서 전국의 가정이 아우성이었다. 봄이 와서 푸성귀가 날 때까지는 김치를 먹어야 하는데 시어버리면 참으로 난처한 노릇이었다. 김치찌개를 주야장천 끓여먹기도 하고 만두도 빚어먹고 전도 부쳐먹고 그랬지 싶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기로 유명했다. 유명하다고 해봐야 친척들 사이에서, 그리고 동창들 사이에서 정도였겠지만 나는 그게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우리 집 김장김치는 유달리 맛있기로 소문이 나서 집에 오신 손님들이 몇 포기씩 얻어가고는 했다. 어머니는 인심 좋게 싸주시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워하셨으니 그건 김치가 독에서 나오면 금세 맛이 변하기 때문이라 했다. 우리 집에서 얻어가면 빨라야 몇 시간은 지나서야 자기네 집에서 맛을 볼 테니, 어머니로서도 맛이 변해버린 김치 맛을 당신의 김치 맛이라고 누군가 오해하는 게 자존심상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해마다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집은 어떤 독에 담는 김치에는 배춧잎 사이에 생태를 숭덩숭덩 잘라서 넣은 적이 있었다. 배춧잎 사이에서 잘 익은 생태를 너무 맛있어하며 식구들이 먹었던 것 같은데 나는 별로 내키지가 않았던 맛이었다. 지금 같으면 술안주로 환상의 맛이었을 것 같은데. 김장을 하면 배추김치만큼이나 맛있었던 게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은 무다. 이게 잘 익으면 고소하고 시원하기가 비길 데가 없이 훌륭한 맛이었다. 점심에 뜨거운 물에 찬밥을 토렴 하고 이 무를 젓가락 한 짝으로 쿡찍어 한 입씩 베어 먹으면 다른 반찬이 따로 필요가 없었다.
추운 겨울날 독에서 갓 꺼내 온 김치는 얼음이 살짝 끼어있을 때도 있었다. 이빨이 약간 시릴 정도의 김치를 몇십 먹다 보면 방 안의 온도에 김치가 알맞게 녹아서 제맛이 돌기 시작한다. 한없이 밥을 먹을 것만 같았던 맛있는 김장김치의 맛이지만 나는 중학교 2학년 겨울을 끝으로 김장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지독한 편식을 하였던 내가 겨울만 되면 명란젓으로 망명을 하여 외국에 나가기 전까지 몇 년 동안은 겨우내 그것만 먹고살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맛있는 명란젓도 사라지고 맛있는 김장도 먹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내 주변에 사랑하는 이들, 특히 주스와 우유에게 내가 먹고 자랐던 맛있는 김장을 먹여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