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무응답이라는 대화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위한 18개의 노트
1부 - 경계에 머무는 사람
1.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가
2. 확신이 없는 사람의 세계
3. 나는 왜 자꾸 사라지려 하는가
4.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 사이에서
5. 내가 만든 것이 나를 만든다
6. 흔적은 때로 말보다 무겁다
Interlude - 머물렀던 자리로부터
2부 - 조용한 무게들
7. 결핍이라는 출발선
8.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해
9.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10. 응시와 침묵 사이의 나
11. 존재는 때로 아주 작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12. 무응답이라는 대화
Interlude - 조용한 무게들을 향해
12. 무응답이라는 대화
나는 한때, 무응답을 견디지 못했다. 답장이 늦으면 초조했고, 침묵이 이어지면 왠지 모르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말이 없다는 건 관심이 없다는 것 같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눈빛은 때로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자꾸 스스로를 의심했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했나? 그 침묵은 상처였을까, 망설임이었을까, 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무력감이었을까. 무응답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건, 내 성격과도 관련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도 먼저 꺼내놓고 보는 성격. 정확한 말보다는 빠른 반응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게 곧 진심이라고 믿었다. 속도를 잃는 것이 불안했고, 침묵은 대화의 부재로만 보였다.
그래서 처음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 땐 참 많이도 부딪혔다. 그녀는 말을 아꼈고, 필요한 순간에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게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무심한 태도가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는 자주 싸웠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조용했다. 화를 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마침내 조용히 말하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말로 다 전달하지 못하는 게 있어. 말은 때때로 와전되고, 오해되고, 다르게 변하니까.”
그 말을 들은 뒤로, 나는 그녀의 침묵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조심스럽고 깊은 감정일 수 있다는 걸…
나는 그제서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 뜻도 없다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침묵 속에서 흐르는 눈빛, 잠시 멈춘 손끝, 말없이 함께 앉아 있는 그 시간들 속에 분명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무응답은 때로 말보다 깊었다. 나를 멈춰 세우고, 기다리게 하고, 끝내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게 만들었다. 말이 없기에, 오히려 내 마음의 소리를 더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안다. 무응답도 하나의 방식이라는 걸…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조용한 응답일 수도 있다는 걸… 마주 보고 있어도 말하지 않는 그 순간에, 우리는 오히려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주었던 순간들, 아무 말도 없던 눈빛 하나에 울컥했던 밤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대화가 무엇인지 천천히 배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대화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