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가

11. 존재는 때로 아주 작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by Hyunseok YOON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위한 18개의 노트

1부 - 경계에 머무는 사람

1.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가
2. 확신이 없는 사람의 세계
3. 나는 왜 자꾸 사라지려 하는가
4.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 사이에서
5. 내가 만든 것이 나를 만든다
6. 흔적은 때로 말보다 무겁다

Interlude - 머물렀던 자리로부터

2부 - 조용한 무게들

7. 결핍이라는 출발선
8.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해
9.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10. 응시와 침묵 사이의 나
11. 존재는 때로 아주 작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12. 무응답이라는 대화

Interlude - 조용한 무게들을 향해





11. 존재는 때로 아주 작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우리는 때때로 크게 흔들고, 뚜렷하게 남겨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머물려면 더 강하게, 더 선명하게 자국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 믿음이 꼭 진실만은 아니라는 걸 배워간다. 존재는 때로 아주 작고, 조용하게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마치 한순간 스친 바람처럼, 기억도 아닌 감각처럼, 말없이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것들...









콩이도 그랬다. 하얗고 작은 몸, 따뜻한 체온, 잠든 듯 고개를 기대던 모습,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털의 냄새... 그 아이는 내 반려견도 아니었고, 나와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 존재는 이상하리만치 내 기억 속에 깊이 박혀 있다. 창가에 누워 졸던 하얀 몸, 살짝 떨리던 코끝의 움직임, 식사 시간에 사방으로 흔들리던 작은 꼬리… 그런 장면들이 지금도 내 마음 한켠에 조용히 남아 있다.









프랑스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콩이는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듣고 눈물 흘리던 아내의 얼굴도 오래 남았다. 작은 생명이 떠났다는 사실만큼, 그 생명을 사랑했던 사람의 울음도 가슴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바람이 따뜻하게 스치는 날이면 한없이 작고 부드러운 체온이 손끝에 닿는 것만 같고, 햇살이 부드럽게 창문을 통과하는 순간이면 거실 한켠에 조용히 누워 있던 그 작은 존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무언가를 바란 적도, 무언가를 증명하려 한 적도 없는 존재... 그저 존재함으로써 따뜻했던 존재...








나는 자주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함께해야 기억에 남는 걸까? 얼마나 큰 무언가를 해야 누군가의 마음속에 새겨지는 걸까?









나는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콩이는 짧은 시간 안에 그 어떤 말보다 진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존재는 시간의 길이나 행동의 크기로 환산되지 않는다. 그 조용한 체온과 미세한 숨결들이 내 삶을 천천히 흔들고 지나갔다는 것을...









그러고 보면 우리의 하루에도 그런 존재들이 있다. 어떤 날의 기온, 한순간의 체온, 문득 느껴지는 향기, 기억 속에 조용히 남은 표정, 지나가던 사람의 걸음소리,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에서 작은 파동처럼 퍼져 나오는 감정들처럼...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들이 하루의 틈 사이에 스며들고, 아무 말 없이 나를 붙잡는다.









누군가와 나눈 짧은 눈맞춤, 따뜻한 말 한마디보다 더 오래 남는 손끝의 감촉,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어떤 표정... 그런 것들이 나의 하루를 천천히, 부드럽게 바꿔놓는다. 나도 누군가의 하루에 그렇게 작고 조용한 흔적으로 남을 수 있을까... 크게 웃기지 않아도, 큰일을 해내지 않아도, 잠깐 스친 눈빛 하나로 내 존재가 전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이제는 조금씩 믿게 된다.









모두가 기억하지 않더라도, 나조차 잊어버리더라도, 그 순간 나는 분명히 존재했고, 어딘가에 아주 작게, 아주 조용히 흔적을 남겼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