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앞서가는

by 임형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가진 가장 큰 능력이,

어쩌면 나를 가장 지치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하고.


현재를 보면서도 현재만을 보지 않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의 구조,

그 뒤에 숨어 있는 원인과

앞으로 벌어질 가능성을 한번에 계산한다.


사람의 말투나 작은 분위기 변화 하나만 봐도,

미래의 흐름과 연결지어 읽으려 한다.


'지금'을 기준점으로 두지 않는다.

항상 몇 단계 뒤를 떠올리고 그 다음 현재를 해석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이 나의 상상 속 속도와 보폭을 따라오지 못한다.


좋은 일은 오기 전에 이미 질렸고,

나쁜 일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상처받았고,

관계는 무너지기 전에 이미 포기한 감정이 생겼고,

성취는 이루기 전에 이미 허무해졌다.


현재는 항상 조금 늦고, 조금 밋밋하고, 조금 비워져 있다.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감정을 구조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냥 좋은 느낌, 그냥 싫은 느낌' 같은 모호한 감정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원인, 패턴, 논리를 먼저 확인하려 한다.


성숙해 보이게 만들 수 있지만, 동시에 문제가 생긴다.


상대방은 날 살갑지 않은 사람으로 느끼고,

나는 상대를 비합리적인 사람이라 느끼고,

이내 서로 오해하고 멀어진다.


내 입장에서는 배려이자 조심스러움이었는데,

상대에게는 거리감과 불투명한 방어기제로 보인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대비한다.

살아남는 데에 유리하지만, 관계에서는 독이 된다.


불확실성은 서로를 묶는 접착제다.

하지만 난 불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가 불안해하는 지점, 흔들리는 순간, 감정적인 변화


그런 틈을 계산하려 하고 만약 가능성을 예측하고 나면

더이상 아무도 영향을 줄 수 없다.


마음이 한박자 느려진 현실을 견디지 못한다.


머리는 미래에 있고,

감정은 현재에 있고,

몸은 과거에 묶여 있다.


균형이 깨진다.


머리는 빠르게 앞서 갔지만,

감정은 따라가기가 힘들고,

현실은 느리기만 해 답답하다.


미래처럼 빠르게 움직여주지 않는 현실에 늘 실망한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결말을 얻게 되고,

어떤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떠날 이유를 정리하게 되고,

어떤 가능성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끝낸 후였다.


능력이 아니라 부작용이다.


현실세계는 항상 느리다.


기쁨은 짧아지고, 허무는 길어진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그 여운을 오래 누리지 못한다.

기쁨은 순간이고 사고는 지속한다.


좋은 일이 생기면 곧장 생각한다.


이 감정은 언제 약해질까?

이 관계는 얼마나 유지될까?

이 사람은 언제 돌아설까?

이 안정감은 어느 시점에 흔들릴까?


예측은 날 지켜주지만,

행복을 오래 머물게 하지 못한다.


좋은 감정은 미래를 생각하는 순간 흘러가버린다.

행복의 반감기가 남들보다 짧을까 생각한다.


남는 건 늘 허무함이다.


예상한 대로 흘러가면 허무하고,

예상과 달라지면 불안하다.


그러니 기쁨과 허무 중에서

허무에 더 오래 머물 수밖에 없다.


사고 패턴의 본질은 이거다.


미래를 먼저 계산하고,

현재를 그곳에 맞추고,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


삶은 안전하게 만들겠지만

더 가볍게 만들지는 않는다.


생각이 앞설수록

삶은 더 무거워진다.


가벼운 마음으로 살기 어렵고

가벼운 기쁨을 느끼기 어렵다.


피로가 쌓인다.


조금 덜 당겨 보고,

조금 더 많이 믿어보고,

과거의 일을 증거가 아닌 참고로 다루는 연습이 필요해보인다.


세상이 느린 게 아니라,

내가 너무 앞서간 것 뿐이다.


달려가던 생각을 겨우 멈춰 세우고,

지금의 온도, 지금의 표정, 지금의 하루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가능성 정도는

서둘러 판단하지 않기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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