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은 인간이라는 본연의 존엄을 존중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인간으로 죽느니 괴물이 돼서라도 살아남으라고.”
과학교사 이병찬이 아들에게 한 말이다.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의 심각한 왕따를 당하는 아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가해자들의 ‘장난’이었다는 말이 기준이 되는 수준의 학교에 절망하게 된다. 아들의 학교폭력 피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고통에 빠진 이병찬은 쥐가 궁지에 몰렸을 때 고양이를 물게 될 때 나오는 물질을 추출해서 아들에게 주사하는데 이 분노가 결국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어 좀비가 된다.
며칠 전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금 우리 학교는’이라는 한국 드라마 12편을 정주행했다. 내 눈에는 청소년의 학교와 사회적 위치와 그들의 힘겨움을 가늠하다가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드라마는 청소년들의 생존을 기반으로 긴박함 넘치는 이야기 전개에 친구 간의 우정과 가족애, 리더십이 뒤범벅된 드라마로 공개하자 전 세계 1위로 뛰어오른 드라마다.
좀비 영화의 특성상 사회비판에 대한 장치가 여러 곳에 있는데 원작과는 다르게 조금 과한 설정을 두었다는 비판을 하는 이들도 있다. 내가 영화 보는 수준이 낮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과한 설정은 크게 보이지 않았고 청소년 세계에 대한 공감이 커서인지 사회적 비판 설정과 약간의 신파 수준은 무시할 정도였다.
사이버 렉카충 수준의 유튜버와 사회지도층의 모순이 나온다. 청소년과 시민들의 죽음과 연관 지어 세월호의 아픔과 코로나19 상황도 떠오르게 했다. 학교와 우리가 살아 내고 있는 이 사회가 거대한 세월호라는 배이고 그 안에 일어나는 팬데믹과 같은 질병을 만나는 우리 모습이 적나라했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청소년이 자살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갔다가 좀비가 되어 가는 또래 청소년들을 내려 보면서 “이제는 세상이 지옥이 되었는데 여전히 달라지는 건 없다.”라고 말하는데 학교폭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청소년이라는 존재의 사회적 위치에 그들의 존엄이 어디 있는지 묻게 되었다.
좀비를 만들어 내는 바이러스의 근원은 우리 어른들의 야만적인 경쟁적 사회에서 인간다움을 막아 버리고 폭력적인 사회 환경의 요인에서 기인한 것으로 읽힌다.
“걔는 몇 등이니? 아버지는 뭐하시니?, 친구 집은 몇 평에 살고?”
친구를 사귀면 꼭 물어본다는 남라 엄마의 질문, 같은 반 친구를 가난하다는 이유로 기생수(기초생활수급권자)라면서 비아냥대고 힘들게 하는 부자 아파트에 사는 나연이 있다. 학교의 폭력이나 문제들은 무조건 감추고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면서 무마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 교장, 끔찍한 학교폭력 피해를 본 여학생에게 네 행동이 문제가 있으니 아이들이 너를 괴롭히는 게 아니냐면서 비아냥대는 교사 모두가 우리 기성세대의 모습이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어떤 상황이 와도 절대 죽지마. 그리고 그 누구도 죽게 만들지 마”, 라고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면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돼”
라고 말하고는 학생을 구하기 위해서 좀비 소굴로 뛰어드는 선생님이 계셨고,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면서 딸의 안전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소방관 아버지, 목숨이 위태로움에도 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경찰이 있었다.
드라마 앞부분 몇 편을 보면서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뜻으로 사지에 몰린 약자가 강적에게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비유가 떠올랐다. 사자성어 찾아보니 ‘궁서설묘(窮鼠囓猫)’였다. 그때까지 드라마에 주요한 청소년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우리의 몹쓸 환경에서 몰릴 때까지 몰려 버린 청소년이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이 보여서다.
어느 순간부터 쥐가 아닌 그들이 고양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청소년들은 주도적이다.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위험을 넘어서는 일을 했다. 그 안에서 풋풋한 사랑은 자연스러웠고 부모에 대해 애틋함과 우정에 감동했다.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 헌신하는 리더십이 있었고 공동체성 안에서 배려와 신뢰가 가슴을 따듯하게 해 주었다.
궁서설묘가 아니었다. 훌륭한 고양이를 나이 먹은 고양이 집단이 따돌리고 비아냥 대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 주는 드라마로 보였다. 그들은 쥐가 아니었다. 이미 고양이였는데 나이 먹은 고양이들이 너는 쥐라고 윽박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청소년을 이 사회의 존엄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환경의 문제가 내 눈에는 너무 크게 보였다.
“학생(청소년)이 그렇잖아. 어른도 아니고 애들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것과 같아.”
좀비에 물렸지만 완전한 좀비가 되지 않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남라가 한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말이었다.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어떤 이상한 존재인 그들. 입시기계 그 이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청소년도 학생의 위치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존엄이 있는 존재다. 인간다움은 인간이라는 본연의 존엄을 존중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넷플릭스 예고편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기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