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에게 복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는 활동이다
누군가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 아닌 '욕망'이라고 했다. 행복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같은 회사,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어떤 이는 만족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하다. 심지어 동료를 해하기까지 한다. 삶에서 깊은 무기력에 빠지는 이도 있다. 만족 또한 제각각이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의 삶이 있다. 모두가 개인적일 뿐이다.
오래전이다. 모 지자체에서 최고위층까지 오르고 은퇴하신 분이 계셨다. 지역에서 무언가 활동 해 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는지 외국에 나가서 사업을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지인에게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공직에 있을 때의 자기 권위를 내려놓지 못하면서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에 힘들어했다고 했다. 불과 지난해까지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하라는데로 모두 했던 수 많은 부하 직원들이 있었고, 명절이면 사과상자 굴비상자 등 즐비하게 가지고 오면서 인사하는 이들 많았지만 퇴직 이후 그 모든 일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정치계나 행정, 교육계 등 공직에서 은퇴한 분들의 이후 삶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된다. 새로운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분들도 있지만 또 한편에서 60대 초반부터 노인행세 하는 분들도 있었다. 이런 분들 중 은퇴 후 1, 2년 만에 외모가 실제로 나이 들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마흔이 되기 전 월급 주던 직장을 사직하고 개인연구소를 만들어 프리랜서를 몇 년 했었다. 사회에 나와 보니 알았다. 명함에 적혀 있던 기관장이는 어떤 역할에 대해 내세울 게 전혀 없었다. 이름만 있는 무허가 연구소가 다였다. 온전히 벌거벗은 나, 그때 나의 실제 역량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와 진정성 가지고 함께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은퇴를 아주 빨리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있다가 다시 지역에서 돌아와서 시작한 ‘청소년자치공간 달그락달그락’. 몇 년 후 ‘길위의청년학교’도 문을 열게 된다.
밤 12시가 넘었다. 지금도 사무실이다. 내일 사업 전체 평가 및 새해 계획 발표하는 날이다. 선생님들이 퇴근을 안 하고 열심히 평가 준비하고 있다. 야식으로 통닭 시켜 먹으면서 수다 떨다가 모두 자기 책상 가서 신나게 키보드 두드린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선생님들은 지금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도 20대에 하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현장 활동뿐만 아니라 연구와 집필 등 질적으로나 네트워크 수준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은 청소년 활동과 관련 연구다. 지금이 행복한가? 모르겠다.
행복을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고 있고 청소년에게 복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선생님들도 그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전북이라는 지역 그것도 군산에 와서 방 얻어 살면서 청소년활동을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사람다운 삶을 위해 자기가 선택한 그 어떤 영역에서 가야 할 길을 갈 뿐이라는 것. 청소년, 지역사회. 그 안에 많은 사람과 연대하면서 그래도 조금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무언가 전문적으로 움직여 가는 일이다. 그게 우리의 ‘활동’이라고 믿을 뿐이다. 내 삶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승진에도 관심이 없고 명함에 적힌 어떤 직위도 욕망하지 않는다. 어떠한 권위나 권력욕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그리 집착하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나에게는 전혀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마흔 언저리에 모든 것을 만들었던 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나왔던 경험이 주요했다. 삶에 의미 없는 치장 같은 평판이나 기관의 직위 등이 쓸데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삶에 참여한다는 것은 가장 본질적이고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가 선택할 일이지만 한가지는 알겠다. 자신이 행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성찰해 봐야 한다는 것. 청소년기관에서의 본질은 청소년의 어떤 변화와 청소년이 살기 좋은 사회로의 변화에 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여긴다. ‘청소년 참여’는 그 모든 활동에 근간이다. 물론 그 이전에 청소년을 만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 또한 그 공간에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참여가 있어야겠다. 문제는 본질을 보려 하지 않으니 당연히 주도적이고 높은 수준의 참여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일이나 직업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것, 어디에 집중하고 있고 그 본질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서 무엇에 참여하느냐는 것이다.
나에게 은퇴는 없다. 하는 ‘일’이 바뀌어 갈 뿐이다. 돈을 벌고 안 벌고의 문제는 다른 차원이다. 월급 받지 않고 연금 받으면 은퇴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꿈꾸고 소망하는 어떤 일들은 평생에 걸쳐 움직이며 만들어진다. 권력이나 많은 돈, 부와 명예도 중요하나 그 이상을 넘어가게 되면 평생에 걸쳐 우리가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 보인다. 그것은 바로 나를 통해 타자가 잘 되기를 위하는 삶이다. 사회적 가치 실현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네 모든 일이 포함된다. 나와 네가 함께 하는 공간에 참여하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를 통해 타자와 이어졌다. 이 글도 누군가 읽히기 위해서 쓰고 있다. 의사도 환자를 돌보고 있고, 기자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 누군가 읽히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 노력한다. 택시기사는 손님을 안전하게 목적지에 태워준다. 우리 사회의 모든 일은 누군가를 위해서 함께 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다. 모든 직업이 그렇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살피고 조금이라도 거드는 일이 우리 행복을 판가름 한다.
은퇴 없이, 돈에 몫 매지 않고 평생을 붙잡고 참여할 수 있는 일을 지금 행할 뿐이다. 그 곳에 잠시지만 매일 조금씩의 행복이 묻어 있다. 누군가 나에게 행복을 묻는다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들려 주고 싶다. “인생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다.” 내가 행하는 일에서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하면서 참여하고 있는지 들여다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