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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디스트 Sep 01. 2023

바보로 살아가는 즐거움...바보예찬

생각 덩어리인 고등 침팬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행복 덩어리인 바보로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대부분 암묵적으로 고등 침팬지의 삶을 택한다. 수많은 생각과 분별력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척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불행의 척도이기도 하다. 바보는 생각하지 않으며 분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하다. 

    

인간이 땅을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진화적 이점을 얻었다. 양손을 쓰게 되면서 이동의 효율성이 생겼다. 시야가 높아지고 입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면서 다양한 음성으로 소통을 가능케 했다. 뇌와 지능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다. 드디어 영장류 중에서도 최고의 영장류가 되었다.     


지능의 발달은 특별한 신체적 강점이 없는 인간들에겐 절대무기가 되어 주었다. 야수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대비하고,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고, 전략적으로 자연을 개발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 절대무기가 지금도 유효한가?     


만 년 전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은 DNA와 뇌의 구조가 다른가? 아니다. 같다. 인간을 둘러싼 위협은 만 년 전과 어떤가? 같은가? 다르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야수의 공격도 일년내내 식량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인간은 이제 만 년 전보다 행복해야 한다.   

  

인간은 만 년 전과 비교해 절대 행복하지 않다. 수많은 이점을 가져다준 지능과 생각은,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내고, 쓰고도 남을, 먹고도 남을 것들에 전력을 다한다. 지능과 생각의 과잉 시대가 온 것이다.     

생각은 몸에 변화를 일으키고, 몸의 변화는 감정을 일으킨다. 아직 만 년 전의 뇌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걱정하며, 야수를 대신해 나와 내가 아닌 남을 관찰하고, 비교하고, 분리한다. 이러한 과도한 생각과 분별심은 몸을 경직하게 만들고, 그러한 몸의 상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 감정은 생각의 반응이 아니라 몸의 반응이다.     


보통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분별력도 없는 사람을 바보라 한다. 그러나 지금 논의할 ‘바보’는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진짜 분별력이 없는, 약간 모자란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정신은 멀쩡한 데 스스로 ‘바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바보’에겐 5무가 있다. 무생각, 무대뽀, 무집착, 무한정, 무걱정.     


바보는 생각이 없다. 즉 분별심이 없다. 편을 가르지 않는다. 내가 곧 너고, 내가 곧 꽃이고, 내가 곧 모든 것이다. 그의 행위는 분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럽다. 생각이 없으니, 몸은 편하고, 몸이 편하니, 두려움이 없다.          


바보는 무대뽀다. 바보는 머리가 아니라 배짱으로 산다. 일단 어떤 욕망이 발생하고 양심에 걸리는 일이 아니라면 저지르고 본다. 결과를 계산하지 않는다. 심지어 목숨에 대한 계산도 없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그는 불길이 치솟는 니체의 베수비오산자락에 집을 지을지도 모른다.     


바보는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다. 내 장난감, 네 장난감이라는 분별이 없어 친구가 달라면 선뜻 내준다. 아장아장 걷다 넘어져 숨넘어가듯 울다가도 엄마가 준 사탕 하나면 조금 전 불행했던 과거는 기억에서 사라진다. 내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유형, 무형의 모든 것에 미련이 없다. 그래서 바보는 대자유인이다.     


바보가 꾸는 꿈은 무한정이다. 한계라는 단어가 그에겐 없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제한받지 않는다. 장자의 대붕은 날개가 수천리고 한 번 날면 구만리나 치솟는다. 그를 바라보는 찌르레기는 그의 몸짓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는 모든 인류를 사랑으로 구원하려 했고, 석가모니는 모든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려 했다. 한계는 스스로 만든 덫이다.   

  

바보는 걱정이 없다. 두려움이 없는데, 불행하지 않은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바보는 자기의 생각으로 살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꿈을 꾼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하늘에 탁 맡기고 살기에 걱정이 없다. 그것이 어디로 갈 것인가는 그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굳이 통제하려고도,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사라진다 해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그 마음이다. 바보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을 살 뿐.     


우리에겐 이미 오래전에 살다 간 위대한 바보들을 알고 있다. 예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등.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바보들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을 따라가기엔 아직 멀다. 우리는 아직 생각이 너무 많고,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분별하고, 무엇보다 그것이 멀쩡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일단 반만이라도 내려놓고, 반쯤 바보로 살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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