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결심하고, 어디서부터 실타래가 잘못 꼬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꼬인 실타래 가장 끝자락에 얼핏 스치는 것은 내가 부자라는 것을 팀원들이 알게 된 시점부터가 아닐까 싶다.
솔직히 말해 난 부자가 아니다.
어떤 부자가 회사에 이렇게 아등바등 다니려고 애를 쓰겠는가!
물론 소수의 사람들 중엔 부자지만 자아실현을 위해 다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부자라면 다른 것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지 이렇게 침몰하는 회사에 악착같이 다니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서 내가 봤을 때 회사에는 부의 기준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 고만고만한 수준의 사람들이 다니는 게 아닐까 싶다. 사회 경험을 위해 잠깐 회사 생활을 하거나 오너의 아들 등등 특수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나도 지극히 일반 부류에 속한다. 부모님이 반포에 거주한다는 걸 제외한다면..
2년 전인가.. 부모님 집이 재건축이 들어가기 전에 부모님 집 근처에 집을 얻고 싶어 거의 무너져가는 곳에 전세를 산 적이 있다. 사람들이 왜 거기 사냐고 물어보면 저렴해서라고 대답하곤 했다. 실제로 언제 재건축할지 모르니 저렴하기도 했고.
그때 우연히 팀장님이 "OO은 재택 할 때 점심 어떻게 해결해?"라고 물으시는데,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이 코앞에 사셔서 가서 먹고 와요~" 이렇게 대답이 나갔고, 난 갑자기 부자 부모님을 둔 걱정할 거 없는 직장인으로 둔갑했다.
당시에는 이 파급 효과가 얼마나 클지 예상치 못했다.
희망퇴직 선정자를 고를 때 내가 우선순위가 될 거라 예측 못했고. 다른 팀원은 외벌이에 가장이란다...
2년 동안 최우수 등급으로 가장 많은 보너스를 받았는데 승진이 누락되리라 생각 못했고. 다른 팀원은 외벌이에 애들이 있단다...
다들 일산과 인천 등 1~2시간 거리에서 출퇴근하는데 10분 거리에서 출근하는 날 고깝게 생각할 거라 예상 못했고. 다른 팀원은 열심히 산단다...
대치동 출신 이사님이 어느 날 불러 부모님 반포 거주하냐며, 어디냐며 호구조사를 한 후 미묘하게 날 견제하는 태도를 보이게 될 것도 전혀 예상 못했다. 그분은 누가 묻지 않아도 대치동 출신이며 부모님이 대치동 산다고 매번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주변 지인들은 다들 부자가 아니더라도 부자 코스프레하며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는데 넌 좋은 거 아니냐며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라고 하는데...
난 부자도 아닌데 부자로 생각하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부모님이 반포사신 다고 내게 돈을 주는 것도 아니요,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요, 결혼 이후 한 번도 의지한 적 없이 오로지 내 힘으로 먹고사는데 회사가 도움은 못줄망정 야금야금 나를 갉아먹는 것 같은 이 상황이 정말. 답답했다.
회사가 침몰하는 중이라 이런 건가?
내가 회사에서 능력적으로 더 확실히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면 부모님이 부자인 게 + 알파가 되었을까? 예를 들어 일개 과장이 아니라 이사였다면?
아니면 더 대단한 사람들만 다니는 회사였다면 내가 악착같이 일하는 게 불쌍해서 돈을 더 챙겨줬을까?
휴. 회사는 참 어렵다.
가난하고 무조건 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겐 또 일을 많이 주고 부려먹는 게 회사라고. 남편은 그 반대인 걸 다행으로 알라고 하는데... 암튼 일련의 사건들로 난 슬슬 회사와 거리 두기에 돌입했다.
다른 회사도 똑같다고 하지만 안 가보면 모르니까.
다른 회사는 그래도 약간은 더 공정하고, 약간은 더 인간적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