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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May 27. 2021

사회는 어떻게 정상을 규정하는가

그 남자의하이힐(2021)/김지미/카카오웹툰

사람을 묘사할 때 종종 쓰이곤 하는 ‘평범하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된다. 표면적으로는 특징이 없다거나 개성이 약함을 나타내지만 뒤에는 사회적 의미가 숨어 있다. 먼저 ‘평범하다’는 말의 반대말을 떠올려 보자. ‘비범하다’ 혹은 ‘특별하다’가 떠오른다. 이 두 말은 기본적으로 우월함을 내포하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선망하는 특성이 된다. 또 다른 반대어도 있다. ‘유별나다’와 ‘특이하다’이다. 똑같이 ‘평범하다’의 반대말이면서 여기엔 부정적 인식이 들어가 있다. 단적으로 설명하면 ‘튀다’ 더 나아가면 ‘거슬리다’ 그리고 ‘불편하다’라는 뜻까지 도달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정리해 보면 ‘평범하다’에는 첫 번째 반대어에 상응하는 부정적인 의미와, 두 번째 반대어에 상응하는 긍정적인 뜻이 동시에 있다. 그리하여 ‘난 왜 이렇게 평범한 걸까.’라는 말에도 한탄이 담길 수 있고,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다.’라는 말에도 역시 비관의 감정이 실릴 수 있다. 그렇다면 ‘평범하다’는 말이 다르게 해석되는 기준이 무엇일까. 바로 ‘평범하다’가 꾸미는 대상이 사회가 용인하는 가치인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사회화 교육의 과정을 거친 이라면 이러한 판단을 누구나 직관적으로 해낸다. 문제는 평범한 사람을 정상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자주 생긴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평범’을 정의하는 기준에서 벗어난 자들을 ‘이상한’ 사람들, 즉 문제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평범하다’는 ‘사회 친화적’이라는 말로 다시 쓸 수 있다.


《그 남자의 하이힐》에서 만석은 ‘개성도 존재감도 없는 평범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남자’, ‘백 번을 마주쳐도 이름도 못 외울 것 가은 평범해 빠진 놈’으로 묘사된다. 그런 인상은 투철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하이힐을 신는 취미가 있었으며 집안에 슈즈룸을 따로 갖춰놓을 정도로 수집에도 열심이었다. 거기에 전문가도 인정할 만큼의 수준 높은 안목과 식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전문성을 과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취미가 공개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SNS에서 자신의 욕망을 대신 채워나간다. 만숙이라는 ‘여성스러운’ 이름으로 계정을 만들어서 그곳에 하이힐을 신은 사진을 꾸준히 올렸다. 그의 계정은 팔로워 수가 67만 8천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얻는다. 만석은 팔로워들에게 언니라고 불렸고, 그에 따라 최대한 ‘여성스러운’ 말투를 사용하며 여자 행세를 한다. 만석의 회사 여직원들은 계정에 올라온 사진을 구경하며 그녀(?)의 하얗고 가는 발 모양을 부러워했고 만숙을 대단한 미인으로 예상한다. 그들은 만석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만숙이 그의 또 다른 이름일 거라고 상상도 못 한다. 그를 두고 ‘우리가 지금 하는 구두 얘기랑은 완전히 딴 세상 사람’이라고까지 말한다.


현실에서 드러낼 수 없던 그의 취향은 SNS에서 성별이라는 변수를 감추자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 받았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내세운 기준을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이힐을 좋아하는 것? 괜찮다. 다만 네가 여자라면. 핵심은 좋아하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에 있었다.


《그 남자의 하이힐》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이 두 가지가 묶이는 일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사람들의 거부감을 피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두 가지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만석은 정확히 그 방법을 따랐다. 현실에서는 앞부분의 ‘남자’만 취했고, SNS에서는 뒷부분의 ‘하이힐’만 취했다. 즉 ‘그 남자의 하이힐’에서 앞이나 뒤, 둘 중 하나를 가림으로써 취향을 누릴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늘 반쪽짜리 존재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실에서든 SNS에서든 온전한 ‘나’가 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의 대체 방법은 현실적 장벽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1화를 보면 만석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저는 여장 남자가 아닙니다. 저는 게이도 아니고 성적 정체성을 감추고 살아가는 힘겨운 영혼도 아닙니다. 저는 단지 100% 신체 건장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하이힐 신는 걸 너무 좋아하는 변태일 뿐입니다.’ ‘변태’라는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정상이 아닌’이라는 수식어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만석은 과연 변태인가? 같은 대상을 두고 주체에 따라 정상, 비정상을 가르는 사회가 더 변태적인 취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본모습을 철저히 숨긴 만석과 달리 그의 주변에는 본래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두 여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회에 만연한 편견의 피해자들이다. 먼저 려은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수하고 평범한 옷차림’을 고수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만 원짜리 시장통 구두’를 ‘매일같이 신고 다닌’다. 그녀는 어딜 가든 그런 취향을 지적받는다. 주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대충하고 다녀?" 라거나 "너 어떡하려고 그래? 여자애가 화장도 좀 하고 예쁜 옷도 입고, 제대로 꾸미고 다녀야지!" 라거나, "여자가 돼서 그게 뭐야?" 같은 말들을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던진다.


그들의 요구 사항이 불합리하다는 건 화주가 겪는 차별을 통해 증명된다. 화주는 려은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외양을 꾸미는 데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한 마디로 려은에게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요구 사항을 모두 충족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화주조차 회사 동료들에게 차별적인 발언을 듣는다. “그 여잔 회사가 무슨 패션쇼장인 줄 알아. 회사에 빨간 하이힐이 말이 되냐고.” “어디 구두만이야? 옷도 아주 난리도 아니잖아. 혼자 예뻐 보이려고 난리 났어, 아주.” 거기에 부장은 대놓고 그녀의 옷차림을 지적한다. “이참에 한 번 몸가짐을 주변에 맞춰보면 어때? 내가 자네 좀 밀어줬다고 여기저기 이상한 소문난 것도 알고 있지? 그것도 다 자네 옷차림이 원인이라고.” 결국 그녀들이 받는 비난은 그녀들에게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들의 취향과 무관하게 사회는 그저 그녀들이 주위의 시선에 굴복하여 그에 알맞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여성에서 여성성이 파생되고 남성에서 남성성이 파생되는 건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평균값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개별적 특성을 싹 다 무시하고 무지막지하게 세운 기준인 것이다. 그러니 여성을 여성성 안에, 남성을 남성성 안에 가두는 것은 매우 협소한 처사이다. 사실은 그 반대로 가야 한다.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는 여성과 남성을 통해 여성성과 남성성의 특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그 기준을 느슨하게 잡아놓아도 그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개인은 언제든 생길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자연적이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은 인위적인 산물이니까.


만석의 발은 슬럼프에 빠진 천재 구두 디자이너 체이스 오에게 강력한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미적으로 완벽했다. 하이힐에 최적화된 그 발의 주인이 여자면 칭송하고 남자면 폄하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괴하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아름다움을 단지 성별의 이름으로 억누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성(中性)과 별개로 중성(重性)을 주창할 때가 아닌가. 여성 안에도 남성성이 있을 수 있고, 남성 안에도 여성성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이제 모두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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