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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Mar 28. 2021

고작 사람에게 사랑은 너무 과분할지도

이토록 보통의(2017)/캐롯/다음 웹툰

이 작품은 긴 호흡의 옴니버스 형식인데, 몇 에피소드를 묶어서 살펴보면 일관된 화두를 던진다. 본디 불완전한 사람이 조건 없는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랑은 너무도 위대해서 모든 이론과 제한을 뛰어넘지만, 사람은 불안을 운명처럼 짊어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사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랑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열등생이 된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말도 안 되는 선물의 정체를 어떻게든 알아내려 하고 도무지 가만 두지를 못한다. 그렇게 멋대로 해부를 하고 나서 부속물을 하나하나 뒤적이다 보면, 사랑은 더는 사랑이 아니게 되고, 그 자리엔 부패한 잔해만이 남게 된다.


문학의 보편적인 플롯을 보면 주인공에게는 어떤 동기가 있다. 그것 때문에 주인공은 고통이 수반되는 갖은 노력을 다 한다. 그리하여 그 대가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 이러한 3단계가 가장 안정적이고 흥미로운 구성이다. 사랑은 어떤가. 명확한 동기도 없고 엄청난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갑자기 사랑이 주어졌다고 생각해보자. 그 자는 과연 행복할까? 오히려 왜 날 사랑하는지, 이게 정말 사랑인지, 사랑이라면 언제까지 지속되는 건지 궁리하기 바쁠 것이다. 그리하여 '동기-대가 지불- 보상'의 단계를 거슬러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랑은 그 가치가 훼손되고, 마침내 사랑의 동기를 파악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사랑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가끔은, 자신까지 파괴한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의심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부분만을 볼 수 있는 무능함 때문이다. 전체와 일부의 상관성을 도대체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은 언젠가 위기를 불러온다. 작품 속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상대를 온전히 포용하지 못하면서도 한정된 일면에서 사랑을 느끼고, 상대의 일부 또는 대체품에서 상대의 전체를 느끼며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사랑한다거나, 거짓을 배척하고 진실된 모습만 가려서 사랑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그래서 회차를 거듭할수록 독자들은 저절로 고민에 빠지고 만다. 내가 바라보는 상대의 모습은 다면체의 한 면일뿐인데, 그런데도 나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다른 면을 발견했을 때 순수한 기쁨과 놀라움이 아니라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면 이전의 감정은 사랑을 연기한 얄팍한 속임수는 아니었을까?


첫 번째 에피소드인 〈무슨 말을 해도〉에서는 에이즈에 걸린 전 애인 J와 그와 사귀었던 선, 선의 현재 연인인 K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과거의 사랑을 소중히 추억했던 선은 K에게 J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순간 K와 선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J는 선이 에이즈에 걸린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선이 연인의 아픔까지 끌어안으려고 했던 과거가 K에게는 선의 결점으로 작용할 뿐이었다. 결국 K는 선과 이별하고 새로운 여자와의 만남에서 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K는 J의 이야기를 듣기 전 선을 ‘완벽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무지가 그런 입장을 심어줬을 것이다. 완벽의 상태는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그녀의 과거가 드러났을 때 곧바로 깨지고 말았다. 선이 전 연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욕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K가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완벽한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게 아닐까? 선은 사랑을 완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무조건적으로 애정을 주는 이상적이고 헌신적인 모습을 그리며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는 K에게 죄책감과 자책의 굴레만 지어 주었다. K는 선이 감염되었을까 봐 거리를 두는 자신을 원망하며 괴로워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연인을 믿고 지키는 것이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사랑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선이 J의 이야기를 고백했을 때 K의 반응은 왜 굳이 이걸 나에게 말하느냐,였다. 선은 사랑하는 사이이니까 모든 걸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었지만 결과만 보자면 그것은 만용이었다. 선은 상대방이 자신의 과거까지 끌어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J는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 선을 원망했다. ‘네가 에이즈든 아니든 상관없어.’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J를 세속적이고 약았다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입장을 바꿔보면 K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내보인 선을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K가 선과 이별한 이유가 그의 사랑이 빈약해서일까? 그가 완벽하다고 느꼈던 과거의 사랑은 순전히 착각이었을까? 두 사람의 이별을 K의 무능과 과실로 돌리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다. 일정한 조건과 환경 하에서만 살 수 있는 생명체를, 단시 생명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변을 변화무쌍하게 바꾸었다면, 그래서 그 생명체가 죽었다면, 그건 실험이 실패한 것뿐이지 그 생명체가 지닌 본래의 가치와 특수성을 폄하하고 훼손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두 번째 에피소드 〈어느 밤 그녀가 우주에서〉를 살펴보자. 우주항공국에서 일하는 P는 1년 동안 우주로 나갈 기회를 얻는다. 그 사실을 들은 연인 은기는 일방적인 이별 통보라 생각하고 마음이 상한다. 하지만 P는 꿋꿋이 우주 비행을 다녀온다. 은기에게 자신을 복제한 로봇 P를 남겨놓고 말이다. 은기는 로봇 P가 진짜 P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1년을 보낸다. P가 돌아온 날 로봇 P는 은기를 떠난다. 하지만 은기는 로봇 P를 잊지 못하고 P의 곁을 떠나 로봇 P를 찾아간다.


복제된 존재가 본체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존재감을 갖게 되는 서사는 이전까지 많이 등장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은기의 선택은 그렇게 충격적이지도 색다르지도 않다. 이 에피소드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런 것보다도 P가 내보인 자만이다. 그녀는 일부러 은기가 로봇 P가 수거되는 과정을 목격하도록 했다. 은기가 그 사실에 의문을 품고 물어보자 그녀는 그냥, 이라고 얼버무린다. P는 은기에게 로봇 P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일 뿐이고 로봇 P와의 추억은 여기까지가 끝이다고 분명히 선을 긋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로봇 P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1년이 지난 후 자연스레 제자리로 돌아갔다면 둘 사이는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P는 진짜로서의 자존심과 자신감이 충만했다. 로봇 P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치명적인 실수는 은기가 로봇 P에게 쏟았던 사랑을 그대로 자신에게 돌려줄 거라고 착각한 점이다. 그녀는 감히 사랑을 통제하려 했지만 그녀의 기대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았다.


사실 P가 의뢰한 로봇은 하나 더 있었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반전은 은기가 1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P는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은기의 기억을 그대로 옮긴 복제 로봇을 만들었다. 우주 비행을 떠난 것도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그녀의 실수는 로봇 은기와 진짜 은기를 동일시한 것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즌 2에 실린 〈너의 서른 번째 조각〉에서는 사랑을 할 수 없는 남자 D가 등장한다. 그는 에이로맨틱이다. 작품 속 설명을 빌리자면 '타인에게 사랑을 못 느끼'고 '한 번도 연애 감정 같은 거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은재는 그와 연애를 시작한다. D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뿐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은재와 키스도 하고 섹스도 했다. 사랑을 못 느낄 뿐 성욕은 있었으니까. 그걸 알고도 은재는 그가 갖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사랑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은재의 속마음은 꽤 의미심장하다. 자, D가 은재를 사랑하지 않는 건 꽤 확실하다. 본인의 입으로도 여러 번 말했다. 그렇다면 D를 향한 은재의 마음은 사랑인가? 은재는 D의 사랑에 목말라하면서 본인의 마음이 사랑이 아닐 수 있음을 가정한다. 심지어 그녀는 은재는 잠든 D를 내려다보며 죽여서 먹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의문이 떠오른다. 에이로맨틱이 아니라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늘 사랑일까?


초반엔 분명 D의 성적 성향이 중대한 결점으로 비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신기하게도 에이로맨틱이라는 특성이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사랑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조건 아래 D가 보여주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보라. 그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은재는 과거의 상처를 외면하고 현실을 직시할 힘을 얻는다. 은재의 독백은 그와의 연애를 완벽하게 정의한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요. 사랑보다 위대한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라 생각하겠어요.' 사람들이 자꾸 사랑을 망치면서까지 그것을 부숴서 실체를 확인하려는 건, 세상에서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는 환상 때문이 아닐까.


사랑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다. 차라리 우리가 사랑을 몰랐더라면, 지금 이 소중한 순간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닌지 저울질하는 어리석은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까. 은재는 사랑을 말하지 않는 D에게 좌절하며 헤어지지만 결국 그에게 돌아간다. 그녀는 3년 간의 연애를 이렇게 정의한다.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다고.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 해도 상관없다고. 서로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어떤 의미로든 서로를 원했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렇다.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이해해야 할 건 사랑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이것이 사랑일까 아닐까 분별하고 정의 내리려는 시도 자체가 그 사랑을 위험하게 만든다. 설령 현재의 진심이 아주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는 연약한 감정일지라도, 온통 거짓말로 뒤범벅된 꾸며진 감정일지라도, 이 순간 살아 숨 쉬는 감정을 쉽게 내팽개칠 합당한 핑계는 되지 않는다. 누구도 우주의 끝을 본 적이 없듯 우리 중 누구도 사랑의 끝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누가 됐든 어디부터가 사랑이고 어디부터 사랑이 아닌지 감히 단정 지을 자격이 없다. 내가 그 사람의 전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이유로 그 사람의 곁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쉽사리 마음을 포기하지 말자. 당신이 어떤 형태의 사랑을 하고 있든 그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보통의 사랑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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