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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Apr 17. 2021

소원에 잡아먹히지 않기

셧업앤댄스(2019)/이은재/네이버웹툰

서원준이 선택권 없이 가입한 동아리는 유명무실한 에어로빅 부였다. 그가 찾아간 부실엔 세 명의 학생이 앉아 각자 할 일을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서원준은 나쁘지 않네, 하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 또한 에어로빅에 아무 관심도 없었으니까. 한편 동아리를 담당하는 계약직 교사 조원선은 교장으로부터 에어로빅 대회에 출전해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의 재계약과 봉급 인상이 걸린 제안이었다. 본인조차 에어로빅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으나 당장의 생활이 걱정이었던 그는 학생들을 설득하기로 결심한다. 고민 끝에 나온 그의 방법은 학생들에게 각자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미끼를 던지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종이에 소원을 써서 낸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내용이지만 이들이 써낸 소원 속에는 각자의 상처가 숨어 있었다. 주짓수 체육관에 다니고 싶은 조규찬, 자동차 운전을 하고 싶은 윤상, 전교 1등을 꿈꾸는 정재형, 마지막으로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서원준까지, 그들이 이러한 소원을 품게 된 동기는 결국 상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 아니 소원을 이룰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하여 조원선도 약속을 지킬 의무가 상실된다. 이 작품은 인물들이 목표를 향해 투쟁하며 성장하도록 두지 않는다. 더 근원적인 층위에서 마음을 어루만지며 소원 자체를 해체해버린다. 부원들은 현재의 소원이 자신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으며 일반적인 성취보다 더 고차원적인 성장을 이루어낸다. 각 인물들의 상처를 안 후 그들의 소원을 다시 살펴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물들이 안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향으로 발현된 것이 아니라 왜곡된 욕망으로 뻗어 있다는 점을 말이다.


이야기는 부원들의 사정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각자가 안고 있는 갈등은 다른 부원들의 개입으로 변화를 겪게 되고 결국엔 당사자가 갈등의 대상보다 힘이 세지는 역전의 순간을 맞이한다. 재밌는 부분은, 에어로빅에 아무런 애정도 없으면서, 에어로빅을 연습한 시간이 별로 되지도 않으면서, 부원 중 한 명이 도움이 필요할 땐 '우린 팀이니까'라는 단합력으로 다 같이 뭉친다는 점이다. 그들은 '에어로빅에 관심이 없다'는 공통점으로 연대감을 이룬다. 그러한 느슨한 의욕 덕분에 부원들 사이에는 갈등이 설 자리가 없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으니 강요가 없고 동아리 안에서 수평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그들은 동아리 활동에 성실히 임하지 못할 만큼 중대한 속사정을 안고 있다. 타개해야 할 심각한 상황이 있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직면해 있다. 그런 부원들이 하필 이 허술한 동아리에 가입한 후 희망적인 국면을 맞이한 것을 우연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명 필연적인 반응이었다. 결과를 보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원을 향한 강력한 열망이 아니라 그것이 우스워질 정도로 단순하고 일상적인 웃음이었다.


소원은 대개 막다른 곳에서 태어난다. 궁지에 몰려서 무기력한 처지에 놓였을 때 가장 극단적이고 단순한 해결법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은 자기 파괴적이다. '나'의 세계는 점점 줄어들어 소원이라는 좁은 영역 안에 갇히고 만다. '나'는 해소할 수 없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그곳에 쏟아붓는다. 어쩌면 부원들의 결속력은 서로가 그릇된 소원에 매달리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본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들은 소원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했고 그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최대한 게으른 노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했다.


엉성한 동아리 활동을 이어갈수록 부원들은 차차 소원의 압박에서 벗어난다. 집중하는 일이 엉성하고 부실할수록 소원의 비장함은 쉽게 벗겨졌다. 그에 따라 그들의 시야도 넓어졌다. 그 덕에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배운다. 그들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을 구한 건 '남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나'였다.


여자 저차 한 일을 거쳐 이들은 대회에 출전한다. 최선을 다했고 실수도 없었다. 그들을 응원하는 친구와 가족도 와 있었다. 한층 성장한 실력을 선보였음에도 그들은 상을 받지 못했다. 나름대로 열과 성을 쏟았던 에어로빅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여전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에어로빅부는 여전히 그들에게 의미를 갖는다. 대회가 끝난 후에도 그들이 동아리 활동을 이어간 것도 그래서이다. 일상으로 돌아간 그들은 여전히 빈둥거리며 필사적인 노력도, 치열한 연습도 하지 않는다. 동아리의 정체성은 '파워댄스' 글씨가 찍힌 단체복, 딱 그것이었다. 어딘가 허접해 보이지만 더없이 편하고 긴장의 밀도가 최저치에 가까운 그런 분위기 말이다.


부원들은 잔뜩 힘이 들어간 각오나 결의를 내려놓음으로써 소원의 함정에서 완벽히 벗어난다. 소원은 종종 간절함을 미끼로 주인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소원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가 절박함의 부족인 것처럼 속인다. 하지만 이 부원들이라면 앞으로 소원에 얽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행복으로 데려다주는 수단으로 절실함보다 여유가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원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고 한 번 주위를 살펴보자. 당장 내 힘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 의외로 널려있을지도 모른다. 소원을 향한 염원이 강력한 자는 늘 긴장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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