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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Apr 04. 2021

나를 평가하려는 세상에게

열무가 익어간다(2013)/박민경/네이버 웹툰

알바를 서너 개씩 해야 겨우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도정미와 금광기업 막내딸로 태어나 어디든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금루비가 보내는 청춘의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도정미가 흥청망청 놀러 다니는 금루비에게 학생의 본분을 지키라고 한 마디 던지자 금루비는 비웃으며 이렇게 대꾸한다. "뭔가 열심히 사는 삶이 옳은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본데, 그건 니들이 열심히 살아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겠지. 안 그래?"


도정미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부유함을 금루비는 거저 누리고 있었다. 금루비의 눈에 도정미의 성실함은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도정미는 금루비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고 큰소리치고 밖으로 나오지만 허탈함에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녀는 금루비에게 화가 나면서도 금루비처럼 여유롭게 살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을 마주한다.


한국의 청춘은 암담하기 짝이 없다. 십 대는 대학을 위해 이십 대는 취직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과연 그들이 목표로 삼는 것들이 청춘 그 자체보다 값진 것일까? 젊은이들에겐 이런 고민을 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경주마처럼 달려 나갈 뿐이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라도 보상이 얻어지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노력과 열정은 어떠한 결과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한 젊은이들은 자신의 무능을 탓한다. 나는 이 지점이 아주 기형적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한 이들이 왜 극심한 자괴감에 빠져야 하는가? 제대로 된 노력을 다 했다면 결과와 무관한 자기만족과 후련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목표를 위해 전력으로 달렸는데도 패배감밖에 돌아오는 게 없을까? 그렇다면 목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청춘의 비애는 실패와 방황이 아니다. 너무도 뚜렷하고 의심할 수 없는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남이 정해준, 거역할 수 없는 목표. 시류라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 속에 각자의 인생은 그저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떠밀리는 대로 밀려나갈 뿐 스스로 방향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주위에서는 끊임없이 압박과 위협을 가해온다. 여기서 벗어나면 안 돼. 대세를 따라 가.


대세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류에서 벗어난 자들을 함부로 실패자라고 규정짓는다. 그동안 우리는 그들의 정의를 너무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왔다. 그 결과 그들의 질서 속에서 상위권에 속하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며 살아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모두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다수의 실패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수많은 물방울들이 좌절감에 빠져야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경쟁에 우리는 언제까지 희생되어야 할까? 그들의 말대로 이 흐름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걸까?


분명 주류에서 벗어나면 방황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잘못인가? 방황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 자체를 실패로 단정할 순 없다. 타인의 의지에 의해 주류에서 밀려나면 낙오가 되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흐름을 찾아 나서면 이탈이 된다. 휩쓸리는 청춘들에게 필요한 건 방황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 결심만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차열무는 못 고치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지만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크게 혼난 후 성공에 집착하게 되고, 어머니가 공부를 말릴수록 더욱 대기업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겐 공부 머리가 없었다. 지원하는 회사마다 불합격하다 보니 하루하루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져 지내게 된다. 어머니가 아무리 자신의 꿈을 찾으라고 조언해도 그는 흘려듣기만 했다. 그러다 금루비의 도움으로 그렇게 원하던 대기업에 입사한다. 차열무는 어머니의 생일에 집에 내려가겠다는 약속을 깨고 곧바로 회사로 출근한다. 하지만 그 날 바로 어머니는 유명을 달리한다.


어머니는 암 선고를 받은 이후부터 차열무에게 그 사실을 숨겨왔다. 그녀는 죽음에 맞닥뜨린 후에야 집안의 강요대로 살아온 선택을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아들만이라도 자신의 꿈을 찾아 살기를 바라며 그렇게 차열무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설득했다. 차열무는 어머니를 잃고서야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그동안 그는 가지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살아왔지만 그 순간부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살기로 다짐한다.


이 작품은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라고 말한다. 밖에 있는 것을 끌어와서 나를 채우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며 사는 것이다. 차지하기 위해 사는 것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 만들어내는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전자는 기준에 바깥에 있기 때문에 쉽게 남에게 끌려다니지만 후자는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온전히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같은 실패를 겪더라도 전자는 제자리에 머물거나 그 밑으로 추락하게 되지만 후자는 오히려 성장하게 된다. 작품의 말미에 차열무와 도정미는 한 단계 성장하지만 금루비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금루비는 끝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차열무가 취직박람회에서 상담을 받을 때 그는 변변한 자격증이 하나도 없다고 지적받는다. 자격증에 따라 한 사람의 쓸모가 결정되는 씁쓸한 현실이 그대로 담겨 있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고 있다. 다만 이 점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스스로가 세상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절망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열무 어머니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세상도 나를 바꿔놓을 수 없다는 걸 행복했던 내 꿈들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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