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구름 Mar 06. 2021

이렇게까지 보여줘도 괜찮겠어요?

루드비코의 만화일기(2013)/루드비코/카카오 웹툰

지금이야 웹툰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만 입문할 때만 해도 나는 정반대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당장 해야 할 것을 하기 싫을 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건 더 싫을 때 찾았던 것이 웹툰이었고 그래서 웹툰을 보고나면 그렇게 기분이 나빴다. 또 시간을 허비했구나 하는 자책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래놓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는 것이 또 웹툰이었다. 웹툰은 그렇게 만만했다.


웹툰을 보면서 갖는 기대감은 딱 하나였다. 이것만 보고 나면 부디 현실의 고민에 직면할 용기를 갖기를. 하지만 그 시기는 끝도 없이 연기 되었고 피로가 쌓인 눈을 억지로 떠가며 웹툰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곯아떨어지는 결말은 매일 같이 반복되었다. 그 사이에 내 안에서는 자기 혐오라는 감정이 점차 강화되었다. 더불어 우울이라는 감정에도 익숙해졌다. 나중엔 심지어 그것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어울리는 딱 맞는 옷을 찾은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게 자기 연민의 변주일 수도 있겠구나. 자기 비하라는 게 결국은 자기 연민의 대외용은 아닐까. 사람들은 자기 연민에 젖은 사람은 깔보지만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에겐 너그러워지는 법이니까.


이 작품의 재미는 단연 작가가 끝간 데 없이 망가지는 데 있다. 이상과 다른 나를 불시에 마주하고 할 수 있는데까지 부정하다가 결국 괴로워하며 받아들이는 초라한 뒷모습을 작가는 과감하게 공개한다. 마음만 먹으면평생 감출 수 있는 자신의 괴랄한 속내를 내보여 굳이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이유는 뭘까.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물론 그것도 맞겠지만 꾸며지지 않은 본래의 나를 인정받고 싶은 내면의 욕망이 더 크지 않을까. 독자는 작가의 실체를 엿봄으로써 관음의 욕구를 해소함과 동시에 나만 실패하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어서 좋고, 작가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만인 앞에 드러냄으로써 자아와 초자아의 화해를 이뤄내니 좋고, 이래저래 유익한 선택이란 생각이 든다.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이 작가가 자기객관화에 얼마나 능숙한지를. 경험을 웹툰의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주관적인 표현이 다듬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애초 찌질한 매력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는 데에서 온다. 주제파악을 지나치게 잘 해내는 것이 유머로 작동하는 것이다.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며 '이것 봐! 나 이렇게 못 났어!'하고 만방에 소리치는 사람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공격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라도 '그게 자랑이냐' 하는 눈길로 밉지 않게 흘겨보며 격의 없는 웃음이 튀어나오게 되는 법이다. 즉, 혼자 있을 때의 나를 공개한다는 건 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동시에 나를 비호하는 행위가 된다.


진지함은 가식으로 충분히 장착할 수 있지만 찌질함은 그렇지 않다. 인위적인 찌질함은 바로 표가 난다. 진정한 찌질함이란 허세를 물기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꽉 짜낼 때에야 그 면모를 드러낸다. 그런데 그 허세라는 걸 탈수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허세나 허영심은 우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을 끈질기게 방해한다. 그렇다고 그 감정을 제거해야 할 숙적으로 바라봐서는 곤란하다. 허영은 허영 나름대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뿐이다. 때때로 자기애에 빠지는 것조차 없이 매일을 찌질함에 휩싸여 살아간다면 삶의 의욕이란 게 남아있기나 할까? 가끔은 허영심에 흠뻑 젖었다가, 때가 되면 자기애를 바싹 말려 건조하게 자신을 바라보았다가, 빨래하듯 이 과정을 반복해야 마음에 세월의 흔적이 은근히 묻어나는 거 아니겠는가.


지금의 나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자아는 가장 이상적인 자아를 상정하고 지금의 나를 그 모습에 맞추려고 한다. 이상적인 자아는 한참 밑에 있는 나를 자신의 위치로 끌어올리려 당근과 채찍의 수단을 번갈아 사용하는데 그로 인해 우리는 자기애라는 마법에 걸렸다가 볼품없는 몰골을 마주했다가 하는 혼란을 반복하게 된다. 이상적인 자아의 시선에서 현재의 나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부진아이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번 시도해도 두 자아가 만날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상적인 자아는 그것을 현재의 내가 모자란 탓으로 돌린다.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역시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괴로움을 당연한 내 업보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우리는 낡고 낡은 진실을 하나 알 수 있다. 불행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상의 나와 일시적이라도 단절할 필요가 있다. 내가 바라는 나를 잠깐 잊는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나름대로 행복해질 수 있다. 만일 잊는 게 너무 어렵다면 적어도 실패의 원인을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이상의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데서 찾아보자.


앞서 말했듯, 자신을 한심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행위는 자기 방어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의도치 않게 나의 허점이 드러나 타인이 그것을 발견하고 달려들기 전에, 먼저 그것을 까발림으로써 상대가 비난할 기회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보호 본능이 발동대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내가 나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미 현실에서 실패로 결론이 떨어진 일을 내가 곧장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기란 꽤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기대와 현실의 격차와 감당해야 하는 괴리감은 비례하기 마련이다.


그 때 발동되는 방어 기제가 바로 희화화이다. 난 망했어, 글러먹었어, 라는 말을 주술처럼 외며 상심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신의 가치를 사정없이 내려치고 깎아낸다. 마치 진지했던 과거의 노력이 얼토당토 않는 헛된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면서 동시에 실패가 갖는 중대한 의미 또한 삭제해버리는 것이다. 꽤 비장했던 도전이 한낱 촌극으로 전락해버릴지라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는 관조보다 적극적이며 인내보다 주도적이다. 그 지경에 이르면 아마 정신줄을 놓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방법은 효과가 있고 어쩌면 환각일지라도 고통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다. 아니 고통을 가지고 유희를 즐기게 된다. 자학의 시간이다.


자학은 철저한 위장술이다. 숨 고를 시간을 잠시 갖는 것이다. 겉으로는 한없이 절망에 빠진 것 같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천천히 회복의 절차를 밟고 있다. 자취를 감추었던 희망의 불꽃이 재점화되고, 흐물흐물했던 의지도 다시 꼿꼿해지고, 비관과 회의적인 기운이 물러나고 긍정과 낙관의 사고가 새로이 들어선다. 극복의 단계다. 이상의 나는 이렇듯 교활하다. 현실의 나가 포기해버릴라치면 얼른 다가가서 상처를 치유해준다. 현실의 나가 아무리 보잘 것 없고 기대를 저버려도 이상의 나는 끝까지 붙들고 늘어진다. 이상의 나가 실현되기 위해서 현실의 나는 꼭 필요한 존재이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러니 가끔 수치심에 익사할 만한 일을 겪더라도, 애써 공들인 일이 수포로 돌아가더라도, 스스로가 한심해서 못 견디겠더라도,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좌절은 잠시 뿐, 우리는 이상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서 영원히 왕복 운동해야 할 운명이니 말이다. 그러니 또 좌절에 빠졌다는 건 좋은 징조다. 어쨌든 시도가 있었기에 좌절도 겪는 것이고, 시도할 여력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발전하리라 믿고 있다는 흔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평가하려는 세상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