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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Mar 10. 2021

당신에게 허락받는 운명

신시의 손님(2018)/이뫄/네이버 웹툰

이 작품 안에서 운명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단지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기회만 보장할 뿐이다. 그리하여 로맨스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운명과 인연이라는 소재를 이용하면서도 여타 작품들과 다른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운명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어찌 보면 폭력적으로 보일 정도로 삶을 좌지우지하는 서사에서는 사람과 운명의 대결이 이야기의 주축이 되어 인물이 강인한 의지로 사랑을 쟁취해야만 한다. 따라서 작품 전체에 비장함과 숭고함이 흘러넘친다. 반면 운명의 영향력이 미미하여 배경으로만 존재할 때에는 운명이 인물의 선택을 기다린다. 인물이 운명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것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운명은 의미를 띤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뭉근한 열망이 애잔한 감정을 덥히면서 그것이 처연함으로 식지도 절규가 되어 끓어 넘치지도 않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한다.


강희의 직업이 복원가인 것도 주목할 지점이다. 당우는 과거 아씨와의 어긋난 인연을 되돌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깨진 청동 거울을 들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은 완전한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강희는 세척한 원형은 두고 레플리카를 만들어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고 들려준다. 이는 강희와 당우의 인연이 과거와 연결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당우는 강희에게 시종일관 예의를 갖추어 거리를 좁혀나간다. 그는 운명을 앞세워 강희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강희가 아씨의 환생이라고 해도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당우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녀의 새로운 삶을 존중했다. 자신의 기억을 강희에게 주입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현재의 강희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갔다.


운명의 힘을 빌려 과거의 인연을 현재에 그대로 재현한다면 현재는 과거의 복제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당우에게 강희의 환생 사실을 알린 귀왕이 가장 경계했던 것이기도 했다. 귀왕이 27년이나 지난 후에야 강희에게 당우를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 그 사이 강희는 복원사라는 꿈을 이룸으로써 오롯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당우가 접근한 방식은 강희에게 선택권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의사를 우선시했다. 그는 강희가 원하는 만큼만 과거를 알게끔 했다. 그녀의 허락 없이 함부로 과거의 일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싶어 할 땐 본인의 몸이 사라질 걸 알면서도 남김없이 알려주었다.


과거가 현재와 긴밀하게 맺어 있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고 현재가 과거에 얽매여 있는 모양새는 아니다. 현재의 결정에 따라 과거와 연결될 수도, 단절될 수도 있다. 강희가 지난 인연을 허락한 것은 한 번도 쉬지 않은 당우의 기다림이 때문이 아닐까. 만일 당우가 강희처럼 새로 태어난 인물이었다면 두 사람의 재회는 그다지 필연적이지도 않고 지금만큼의 간절함도 없었을 것이다. 당우는 아씨와의 인연을 생각하면 과거에서 온 사람이지만, 강희의 환생을 기다렸다는 면에서 그녀보다 미래에 속한 사람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그가 긴 기다림으로 마침내 현재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강희의 마음이 올 때까지 그의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당우처럼 전생을 기억하지만 그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 인물이 있다. 당우와 아씨를 살리고 섬에 들어간 후 아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던 요한이다. 강희의 마음을 쉬이 짐작하지 못하고 매사 조심스러웠던 당우와 달리 요한은 강희가 언젠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미 강희가 고백을 거절했음에도 그는 그녀의 곁에 맴돌며 자신의 마음을 꾸준히 드러낸다. 자신감의 근거는 운명이었다. 전생에 마음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현재에서도 분명 연인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강희는 운명을 과신한 요한이 아니라 운명이 독이 되진 않을까 저어한 당우와 인연을 이어간다. 당우는 강희가 전생을 알게 되면 자신을 악연으로 여길지도 모른다는 시름에 잠겨 지내다가 진실을 감추려 허둥대는 자신을 돌아보고 불타 죽는 위험까지 감수해가며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그는 운명이 아니라 강희가 마음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리고 강희는 청동거울 속에 들어가 억지로 인연을 잡지 않고 혼자 우는 다정한 남자를 발견한다.


오래전,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퍼뜨린 소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화 아씨가 있었다. 그녀가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은 그것밖에 결백을 주장할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강희라는 여자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선화 아씨는 꿈속에 나타나 강희에게 이제 울지 말라고, 고마웠다고 인사를 건넨다. 그 인사에서 우리는 운명이 존재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운명은 우리의 발목에 과거를 매어놓는 것이 아니라 상처로 뒤덮인 과거가 현재의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를 전달해주는 매개체이다. 현재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은 고통 속에서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는 것, 그리하여 어제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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