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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Jun 19. 2021

내가 아닌 나

도플(2015)/현철/다음웹툰

흔히 도플갱어를 떠올리면 똑같은 두 사람이 만나면 죽는다는 설정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도플》에서는 서로 죽이기는커녕 둘 사이에서 적대적인 감정조차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람은 동거인으로서 서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며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곳에 살던 두 사람이 낯선 자기를 마주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 명이었다가 두 명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두영과 이두일은 분열되기 직전까지의 기억을 공유한 두 개의 인격체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서사가 진행될수록 본체라 할 수 있는 이두영에 대한 호감은 점점 줄어들고 독자가 이두일에게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두영은 총 세 번 분열한다. 그때마다 각각 이두일, 이두울, 이두삼이 생겨난다. 분열이 일어났을 때의 조건을 차례대로 나열해보면 짝사랑하는 차지혜에게 고백하지 못했을 때, 이두일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 때, 이두울을 죽도록 패고 싶었을 때이다. 종합하면 이두영은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마다 분열을 일으켰다. 그리고 분열을 거듭할수록 생겨난 인물들은 갈수록 위협적인 성향을 띠었다. 


이두일은 고백을 망설이는 이두영에게 단순히 말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지만, 이두울은 이두영을 집안에 가둬놓고 본인이 밖에 나가 이두영 행세를 했고, 이두삼은 앞뒤 가리지 않고 이두울을 찾아가 폭력을 휘둘렀다. 즉 이두영의 분신들은 이두영의 욕망이 현실과 화해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일종의 부산물로 볼 수 있다. 분열의 조짐이 꿈이라는 것도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한다. 분열이 일어나기 전마다 이두영은 강력한 절망감을 맛보는 꿈을 꾸었고 눈을 떠보면 자신과 똑같은 외형의 인물이 생겨나는 식이었다.


이두영이 이처럼 잦은 분열을 겪는 것은 그의 자존감이 낮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이 본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유치원에 들어가자마자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경험을 하며 유아기의 환상에서 쫓겨난다. 초등학생 때는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질투를 느끼며, 중학생 때는 소극적이고 우울한 성격을 완성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그는 기본적으로 삶을 대할 때 불만적인 태도를 갖추게 되었고 늘 결핍에 시달렸다. 이두영이 시도 때도 없이 허기를 느끼고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것은 그러한 속성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두영의 생각이 짧았던 것은 분신들이 본인에게 충성할 것이라는 막연히 짐작이다. 그는 분열된 인물들을 본인의 하수인처럼 대했다. 분신들 중 가장 순응적인 이두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일단 이두영은 침대에서, 이두일은 바닥에서 잠을 잔다. 이두일은 출근 전 이두영을 위한 밥상을 차려놓고 두 사람의 생활비 또한 그가 카페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충당한다. 오죽하면 이두일이 넌 우리가 아니라 너만 생각한다는 식의 말까지 했을까. 그만큼 이두영은 분신들을 자기 소유물로 착각하며 지냈다.


그는 각각의 분신 또한 주체적인 삶을 원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에게 분신은 늘 객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신들은 개별적인 의지를 확실히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두일은 본체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열등감을 느꼈고, 이두울은 집안에 갇혀 평생 살게 될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러한 감정만 하더라도 이두영은 절대 느끼지 못하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경험이었다.


분신들은 보류된 소망의 화신이었기에 이두영이 해당 소망을 실행하고 나면 사라지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두일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성공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끝까지 이두일로서 살고자 했던 마음 덕이었다. 그러한 결심이 이두울의 결말과 다른 결말을 불러왔다. 이두울이 사라진 이유는 이두울로서 살고자 하지 않고 이두영의 삶을 빼앗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두일은 이두영이 짝사랑하는 차지혜가 아니라 같은 카페에서 일하는 오하나를 좋아했다. 단순하게 머리색만 보더라도 이두울은 이두영과 머리색이 같아서 잘 구분이 가지 않는데 이두일은 빨간색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이두일이 이두영에게 떠나겠다고 통보한 뒤 이두영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그를 만나러 간다. 중요한 건 그날이 차지혜가 출국하는 날이었다는 점이다. 이두영은 차지혜가 떠나기 전 고백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이두일을 붙잡기 위해 그 일을 까맣게 잊는다. 만약 이두영이 고백에 성공한 뒤 이두일에게 갔다면 두 사람의 화해는 부가적인 사건으로밖에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두일이 사라질지 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고백 먼저 해버리고 사과를 하는 이두영의 마음이 진실되게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두영은 이두일과 만나기 위해 카페로 찾아가는데 그를 기다리는 동안 깜빡 잠이 든다. 이때 꾼 꿈이 이두영이 꾼 것 중 가장 희망적이다. 이두일과 원만하게 화해도 하고 차지혜도 유학을 떠나는 대신 그의 곁에 머무는 내용이다. 그런데 꿈에서 깬 뒤 이두영은 이두일에게 미안하다가 아니라 고맙다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사과가 아니라 감사로 전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한 마디로 마음을 전해야 한다면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 생각해.' 그때 이두일은 그를 무시하지 않고 그에게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잘 생각해보면 이두일은 이두영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나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이 미안해가 아니라 고마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 미안하다는 말은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므로 이두일을 더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킬 위험이 있다. 더구나 미안하다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용서라는 별도의 무거운 과제가 주어지지만 감사하다는 말은 굳이 답변이 필요 없는 표현이다. 그저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두영은 이두일을 잃기 직전이 돼서야 그에게서 호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이두일을 도구로 바라보았던 시선을 바로잡는다. 무엇보다 이두영이 차지혜를 따라 프랑스로 떠남으로써 이두일은 이두영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맞는다. 이두영이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는 건 이두일이 그의 고백에서 무관한 위치에 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두일은 누가 누구의 분신인지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둘 다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변화 속에서 행복해진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생김새를 가진 두 사람이 완벽한 타인이 되어 갈수록 두 사람은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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