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쥐떼들이 언덕을 넘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그것들을 노려본다. 그는 다리 위에 홀로 서있다. 뒤를 돌아보기 힘들다. 마른침을 삼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파란 하늘은 무심하게 맑다. 그들은 어느새 다리까지 와있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준다. 더 이상 그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크게 한걸음 앞으로 나아 선다. 말발굽으로 검은 쉬르꼬를 걸친 병사의 어깨를 쳐서 넘어뜨린다. 멈추지 않고 장검을 휘둘러 옆의 병사의 목을 잘랐다.
칼을 든 손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 갑옷 사이를 정확히 찌르고, 목 관절까지 베고 들어가 꺾는다. 장검이 다시 바깥으로 나오자 피가 분수처럼 허공에 흩날린다. 칼은 멈추지 않는다. 분노가 서린 검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겨드랑이를 찌르고 걷어 올린다. 잘려 나간 팔은 힘없이 창을 떨어뜨린다. 그는 싸우는 도중에 문득 뒤를 돌아본다.
순간 적의 화살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방패로 몸을 가리며 달려드는 병사를 밀쳐낸다. 말의 앞발을 들어 멀리 반대편 언덕을 살핀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끝없이 밀려들고 있다. 그의 부하들은 수십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분을 지키는 정예병사마저 얼굴에 두려움이 맺혀있다. 어느새 적들이 헤엄쳐서 해자를 건너고 있다. 화살은 이미 동이 나서 대응할 방법이 없다. 침입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끝까지 싸워도 우군은 도착하지 않을 것이다.
전장의 형태
갑작스러운 반란으로 성이 함락된 것은 한 달 전이다. 도피하다시피 전장을 헤맸다. 이미 절반 이상의 영주들이 쿠데타군과 연합했다는 전령은 곳곳에서 달려왔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산발적인 전투에서 계속되는 병력 손실은 회복이 불가능한 정도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 매튜 백작이 손을 내밀었다. 유력한 영주인 그의 전령에 서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 발생하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그곳으로 가는 일 외에는...
백작의 여름 별장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성을 지키는 기사는 문을 열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우리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을 것이요. 불행한 전투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요."
그는 성 위의 기사를 향해 외쳤다.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추시오. 이게 무슨 무례한 행위요. 우리는 매튜 백작의 초대로 온 것이요."
그러나 독수리 문양의 깃발만 펄럭일 뿐 대답은 없었다.
그때였다. 반대편 언덕 너머에서 검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몸을 숨기고 이동했음에도, 이렇게 빨리 들이닥치는 것을 그는 이해할 수 없다. 백작의 변심 때문일까. 생각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밀정은 그의 부하일 수도 아니면 나의 부하일지도 모른다.
다시 화살이 날아온다. 그의 방패를 빗맞고 세워둔 바리케이드에 꽂힌다. 뒤를 돌아본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사방이 적들인 상황에서 믿을 것은, 이제 장검과 오직 그분뿐이다. 그는 마법 같은 언어를 주문처럼 되뇐다. '당신을 위해...' 칼집에서 검을 쥐고 빼낸다. 묵직한 울음이 그의 장검에서 손으로 전해진다.
'세계를 바꾸는 힘은 세계의 한계를 바꾸는 힘이다. 세계는 고정불변이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 한계를 바꾸는 일일 뿐이다. 내 안의 세계가 곧 세계 전체다. 내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김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