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산 읽기, 알랭 바디우, 10월 17일 단상
'주체란 진리의 사건에 대한 능동적 충실성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주체는 진리의 투사임을 의미한다.' -바디우
진리 사건으로 우발성
진리의 투사로 태어난 주체는 없다. 다만 우발적 마주침을 필연의 사건으로 만드는 주체가 있을 뿐이다. 그는 진리의 가능성을 불가능성 속에서 계시처럼 받아들인다.
그에게 우발적 마주침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의 사건을 알아채는 열림이다. 그의 하루는 무의미하거나, 관성적인 일로 점철되어 있고, 때때로 편협하고, 수시로 선입견의 색안경을 쓴다. 돈을 벌어야 하고, 그것을 위한 일상이 조직되어 있는 시스템 안에 갇혀있다. 그것을 잠시 벗어났다고 느껴지는 시간에는, 안타깝게도 바쁘지 않기에 밀려오는 헛헛함과 불안을 감당해야 하는 이중의 난제를 안고 있다. 불완전 연소의 찌꺼기는 누구도 대신 감당해주지 않기에. 허기진 주체인 그는 우울한 주체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내몰려있다.
탈출에 관하여
그는 미로 속에 갇힌 존재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축제는 끝나버린 지 오래다. 아리아드네가 주었던 금빛 실타래는 먹고 사느라 바꿔버린 지 오래다. 실재의 사막을 홀로 감당하기에 몸이 너무 시리다. 봄날은 갔지만, 그 사실을 살아내는 것은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다. 핍진한 진실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는 이미 생존 게임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을 수용해버렸다. 그렇게 인정과 화해로 가장된 뭉툭한 언어는 어떤 무기도 없이 미노타우로스에게 데려갈 뿐이다. 살아있기엔 너무도 죽어있고, 죽어있기엔 너무도 살아있는, 그는 너무 빨리 죽는다.
어느 순간 멀리서, 축제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은 모스 신호처럼 띄엄띄엄, 엷은 이미지로, 하나의 문장이거나 혹은 노래의 후렴구로, 다채로운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모두를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신호도 아닌 것을 알아보는 것은 그의 존재의 함량과 연관되어 있다. 모스 부호를 다 아는 정도를 초월한 직관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것은 파토스이거나, 로고스였거나, 에로스이기도 한 언어를 장착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맨발로 환대하는 일이며, 꿀벌에 활짝 열린 꽃처럼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를 장소 없는 장소로, 영원 같은 순간을 간직한 집으로 만드는 것이다.
서늘한 용기
시공간의 열림의 순간은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이에게 현현한다. 영원 같은 순간을 위해 멀리서 아름다운 이는 도착했다. 타자는 헤테로토피아적 장소와 시간에 갑작스럽게 들어온다. 그리고 아무도 들지 않는 촛불을 밝힌 이를 찾는다. 그러나 그의 언어가 터무니없이 부족하거나, 존재의 수준이 미흡하다면 낯선 손님을 환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불꽃놀이처럼 완성의 순간 사라지는 사랑은 존재를 구원하지 못하고 '아 예쁘다'와 함께 휘발되고 말 것이다.
우발성을 필연의 사건으로 만드는 일은 그의 과업이다. 그것은 유한성을 벗어나는 순간을 잊힐 수 없는 사건으로 존재에 기입하는 일이다. 진리 기계로서 스스로 낙인찍힌 자가 되는 것. 아무도 받지 않으려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계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위해 그는 매일 싸운다. 단 한 번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몰락을 원하며, 그녀도 모르는 몫까지 주기 위한 언어가 장착되길 원하고, 재앙의 아름다움을 위해 작은 죽음도 불사하는 존재가 되길 기원한다.
그러나 이는 불같은 열정이 아니다. 불꽃놀이 이후, 봄날 이후, 축제 이후의 일을 살아내는 일이기에. 그것은 서늘한 용기로 가능하다. 계속할 수 없을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일. 진리의 계시를 받은 유일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일. 오직 무용한 일을 지속할 때, 갑자기 현현한 아름다움에 두려움 없이 건너갈 수 있다.
그는 비로소 유한성을 탈출하여 아득히 먼 곳으로 초대받는다. 어느새 진리의 성채에 도착해 그녀를 만났다. 그를 위해 남겨둔 이맛돌이 성배처럼 올려져 있다. 그녀가 손을 내민다.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은 함께 맞잡는다. 키스톤이 높이 들어 올린다. 굳게 닫혔던 미로는 활짝 열린다.
'진리의 투사는 인류 전체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적 투사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 창조자, 새로운 이론적 장을 여는 과학자 그리고 세계가 마법에 걸린 연인이기도 하다.' -바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