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기사

10월 16일 단상

by 김요섭


새벽의 온기


새벽 어스름 그는 눈을 뜬다. 거친 바닷바람이 갑옷과 털가죽 사이로 손을 넣는다. 늦가을 한기(寒氣)의 애정 어린 공세를 지친 몸은 무의식적으로 밀어낸다. 그들의 행위에 관심 없다는 듯, 눈꺼풀은 내려오다가도 얼음장 같은 손길에 깜짝 놀라 하얀 배를 내밀고 만다. 아직 날은 밝지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가 지나면 동이 터 올 것이다. 이제 교대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의 몸은 둥글게 말려있다. 꺼져가는 숯의 온기에 몸을 최대한 밀착한 채, 활처럼 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잊고 있었던 듯 장검 옆으로 몸을 뻗어 더듬는다. 마지막 남은 고목 줄기를 숯에게 던진다. 검게 그을린 자국을 보이며 사방으로 튀어 오르던 숯은 고목 사이로 사이좋게 붙는다. 바싹 마른 껍질, 삐져나온 흉터, 수십 겹의 나이테 곳곳으로 화마가 뻗쳐간다.


고목은 이미 죽어버린 옷을 훌훌 벗어던진다. 뜨거운 열기에 자신의 온몸을 맡긴다. 죽었던 그는 다시 한번, 죽음으로서 비로소 생을 되찾는다. 붉은 기운은 차갑게 굳어버린 혈관과 섬유질을 일깨운다. 뼈마디 밖에 남지 않았던 신체는 작은 죽음의 순간 붉은 피와 뜨거운 피부를 되찾는다. 젊은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향해 뻗어갔던 자신감을 이 순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을 대체할 지독하게 밝은 손님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 남은 힘을 세차게 뿜어낸다. 완성의 순간, 장작은 비로소 활기를 되찾는다.


그는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삐져나온 팔을 털가죽으로 밀어 넣는다. 무심하게 가슴을 한번 토닥이고는 젖살이 남은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시 타오른 노란빛은 아이의 윤곽을 강렬하게 비춘다. 귓불과 입술 사이로 길게 난 흉터 자국이 마른 껍질처럼 붙어있다. 고통의 흔적을 손을 대지 않고 슬며시 어루만진다. 그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초점이 흐려진다.



그을린 아이


검은 숲이 시작되는,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그는 앉았다. 멀리 화산재가 흘러내린 민둥산이 보이고 그 아래 시체들이 즐비한 평지가 보인다. 중원에서 시작한 싸움은 평원의 경계까지 밀려나 있었다. 그가 찌르고, 베고, 자른 몸은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다. 전투는 끝났지만 한계까지 다다란 여운은 남았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다. 피가 식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발 옆에 팔이 잘려나간 시체가 눈에 들어온다. 투구 아래, 애꾸눈을 가리고 있는 가죽 끈이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벨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하나씩 보인다. 다리가 배 위에 올려져 있는 시체 옆으로, 쇄자갑이 달린 의수가 보인다. 누구의 팔인 지도 알 수 없는 은빛 쇳덩이는 잘려 나가 핏물이 고인 웅덩이에 걸쳐져 있다. 엷은 비늘 갑옷이 완전히 찢긴 시체도 보인다. 그의 몸은 수없이 찔린 칼의 흔적으로 너덜너덜해져 있다. 피와 내장은 이미 다 빠져버려 수축해진 몸뚱이는 처량하게 옆으로 널브러져 있다. 시체들은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무언의 언어로 호소하고 있다.


그때였다. 너덜너덜해진 시체 밑에서 무언가 꿈틀거린다. 창백한 손이 새싹처럼 대지에서 손을 뻗어나온다. 온 힘을 다해 솟은 것이 파르르 떨며 움직임을 멈췄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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