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스의 시간
니체 읽기(12), 10월 13일 단상
아레스의 시간
그는 피 묻은 칼을 본다. 살점이 떨어진 칼은 은빛 상처를 드러낸다. 온전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균열된 흔적은 늘어지는 햇빛에 산란된다. 칼은 노란빛도, 붉은빛도 아닌 모호한 검은빛을 띤다. 날을 따라 흐른 타자의 피만이 돌보지 않는 고통을 보듬을 뿐이다.
그는 잊고 있던 자신의 몸을 어루만진다. 오른쪽 가슴과 어깨에 걸쳐있는 검붉은 자국은 갑옷의 흉터처럼 남아 있다. 철퇴에 찍힌 둔탁한 자국은 전투의 내상을 말없이 보여준다. 그의 주변으로 까마귀들이 날아온다. 검은 전령은 주인을 잃은 몸에 사이좋게 내려앉고는 쪼아대기 시작한다.
중원의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대규모의 전면전은 이미 끝났고, 산발적인 전투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휘날리던 깃발은 꺾였고, 흉측한 몰골의 깃대는 노란 내장을 꺼내놓고 숨을 헐떡인다. 찢긴 얼굴은 바닥을 헤매며, 그를 섬겼던 이들의 피를 하염없이 삼키고 있다. 깃발의 그림자가 더 이상 드리우지 않는 전투는 의미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전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았다. 물러설 이유를 찾기는커녕 전투는 더욱 치열해진다.
피에 취한 이들의 결투는 살육 자체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손속의 사정을 두지 않는다. 깃발을 벗어난 싸움은 인간의 굴레마저 던져버리고 피를 탐한다. 아레스의 축복을 받은 전사는 더 많은 생명을 원할 뿐이다. 작은 폭포가 된 붉은 눈물은 시내가 되어 흐르고, 민머리 독수리는 웅덩이 가득 고인 피를 마신다.
지독하게 비현실적인 장소에서 그들의 전투는 이미 승패를 넘어서 있다. 태양마저 붉은 체취를 흘리고 난 다음에야 아레스의 시간은 비로소 멈출 것이다.
살아남은 전사는 전리품처럼 시체가 쌓인 곳에서 불을 피운다. 화성이 뜬 밤하늘을 향해, 승리를 자축한다. 늦은 저녁식사는 그들의 피를 다시 채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인간들 사이에 있게 된 이후로 다음과 같은 일을 수없이 보았다. 이 사람에게는 눈 하나가, 저 사람에게는 귀 하나가, 세 번째 사람에게는 다리 하나가 없고, 또 혀나 코나 머리를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다시 말해 한 가지만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을 뿐 다른 모든 것은 결핍된 자들, 예컨대 하나의 커다란 눈 혹은 하나의 커다란 주둥이 혹은 하나의 커다란 배 혹은 그 밖의 커다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 이런 자들을 나는 전도된 불구자라고 부른다.'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