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지향하는 노래

레비나스 읽기, 비관조적 현상학, 8월 31일 단상

by 김요섭


비관조적 현상학


의미는 빛보다 소중하다. 사물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빛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빛을 따라간 시선은 다 밝힐 수도 없지만 타자를 이해된 것으로 소비한다. 오디세우스가 낯선 것과의 대결에서 결국 승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타인자는 적당히 파악된 후 버려진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다만 지향될 뿐이다. 그것은 '부달성' 즉, 도달할 수 없는 무한, 아름다움, 사랑의 장소, 아니 장소 없는 장소로서 존재한다.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에서 피아의 격차는 초월적으로 벌어져 있으나 지금 여기, 타자의 얼굴로 현현한다.



'시선은 죽이고 노래는 살린다' - 모리스 블랑쇼


시각과 촉각은 즉발적이다. 오래 보고 이해하는 것은 대화의 형식으로 가능하다. 보이지 않고, 관조할 수도 없으며, 빛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음성은 타자에게 다가간다. 그것은 응시하지 않고 관계하며, 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말을 건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알아듣는다. 동일성의 칼로 살해한 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타자의 음성은 노래의 날개로 주체의 어깨에 도래한다.


이성적 판단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도달했다고 여기는 사유에는 생의 두께가 없다. 주지주의에는 무한이 없는 전체성(레비나스)이 있을 뿐이다. 살아있으나 너무도 죽어있는 권력이 오래 살아남아 타자를 억압한다. 살갗의 감촉, 피부의 온기를 모르는 해골은 생을 고찰하나 삶을 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