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 쩜장
동작구 보라매 공원에는 작은 텃밭이 있다. 그 옆엔 옹기종기 장독대가 함께 한다. 옹기 근처엔 분홍색, 보라색 이름 모를 외국 꽃이 화려하게 폈지만, 역시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어릴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봉숭아와 목화꽃이다. 그 소박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엄마의 장독대가 떠오른다.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엄마의 정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던 장독대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도 장독대에는 한동안 장이 골고루 담겨 있었다. 그 장맛에 길든 우리 형제는 그 후로도 몇 번씩 필요할 때마다 장을 가져다 먹었다.
김장에 버금가는 행사로 추수를 끝내고 추운 겨울이 오면 엄마와 아버지께선 메주를 만드셨다. ‘메주는 원래 추운 날 쑤어야 더 맛있다’는 말이 있다. 황토에서 자란 콩은 알부터 동글동글 그 크기와 생김새가 고르고 예뻤다. 여러 번 씻어서 혹시 들어갔을지 모를 돌멩이를 걸러내고 깨끗한 물에 콩을 불린다. 불린 콩은 장작을 때서 구수한 냄새가 날 때까지 삶는다. 삶은 콩은 손으로 비벼도 부서질 정도가 돼야 한다. 이때쯤 우리는 엄마 곁에서 콩과 함께 푹 삶아진 꿀고구마를 간식으로 먹었다. 그때 먹은 콩알이 군데군데 붙은 고구마는 그해 가장 맛있는 고구마였다. 잘 삶아진 콩은 식기 전에 으깨야 메주가 예쁘게 만들어진다. 아버지는 절구에 메주 하기 딱 적당한 정도로 곱지 않게 빻아 주신다. 엄마는 길쭉한 네모 모양으로 메주를 만드신다. 메주는 정성 들여 만들어서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바람을 잘 쐬어줘야 썩지 않고 장을 담그기 좋은 메주로 마른다. 아버지는 사랑방에 볏짚을 깔고 메주를 날라 잘 마르도록 띄엄띄엄 놓아두신다. 어느 정도 마른 메주는 새끼줄에 꿰어 바람이 잘 통하는 벽에 매달아 주셨다. 장의 기본이 되는 메주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맛이 깊어진다.
장 담그기는 주로 정월 ‘손 없는 날’을 택해서 담글 만큼 중요한 행사다. ‘장이 단 집은 복이 많다’는 말이 있는 건 추위가 풀리기 전에 담가야 메주에 소금이 덜 들어가 삼삼하고 단 장맛을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손 없는 날’ 담가야 어떤 부정도 타지 않을 거라는 염원도 담겨있다. 엄마는 장을 담그면서 꼭 쩜장을 만드셨다. 쩜장은 충청도에서 처음 먹기 시작한 음식으로 쌈장과는 다르다. 한번 먹으면 자꾸 생각나는 중독성이 무척 강한 음식이다. 잘 띄운 발효된 메주에 소금물을 넣어 장을 만들어 간장을 추출하고 남은 메줏덩어리로 만든 것이 된장이다. 쩜장은 간장을 추출하지 않은 온전한 메주와 고춧가루, 고추씨, 보리쌀로 밥을 지어 소금을 넣어 만든 장이다. 여기에 김장 김치 국물이 들어가면 맛이 확 올라간다. 된장보다 싱겁지만, 한 입 먹자마자 입에 착 감기는 환상적인 맛이다.
보리쌀을 깨끗이 씻어서 압력솥에 물을 넉넉하게 붓고 죽처럼 밥을 한다. 보리밥에 메줏가루와 고춧가루, 고추씨, 소금을 넣고 잘 섞이게 저어준다. 김장 김치 국물로 나머지 간과 농도를 맞춘다. 엄마께서는 잘 혼합된 쩜장을 부뚜막에서 하루 이틀 숙성시켰다. 밥상에 쩜장이 오르는 날은 쩜장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뜨거운 밥에 쓱쓱 비벼 먹는다. 특별한 게 들어간 것 같지 않지만, 어떤 일품요리 못지않게 다른 반찬이 필요 없었다. 짜지 않아서 노란 배추 쌈에 쩜장을 듬뿍 얹어 먹으면 밥 한 그릇으로는 부족하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음식들이 있다. 그 지역만의 개성을 엿볼 수 있고,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 말이다. 쩜장은 입에 익은 음식이지만 오랫동안 먹지 못했다. 그만큼 지역에서도 흔치 않은 음식이 되었다. 그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이는 음식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입맛도 적응해 가는데 그와 동시에 옛것을 자꾸만 그리워한다. 옛것은 주로 시간이 오래 걸려야 나오는 음식, ‘슬로 푸드’가 많다. 슬로 푸드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생산된 먹거리다. 지역에서 나오는 식재료로 맛과 건강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음식이다. 우리나라의 장 종류는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과정을 거쳐야 결과물이 나오는 대표 슬로 푸드다. 이것의 핵심은 음식을 만든 사람에 대해 감사하며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는 것이다. 공원의 장독대를 바라보다 잃어버렸던 엄마의 음식을 더듬어 기억해 냈다. ‘나 정말 좋은 음식을 먹고 자랐구나!’ 그때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느끼지 못한 감사함을 지금에서야 깊이 느낀다. 그것은 세상에 다시 없을 깊은 맛을 넘어 숭고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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