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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Sep 28. 2019

아파트가 파괴한, 그리고 파괴하고 있는 마을 생태계

소비주도 성장에서 벗어나기 2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 창문 너머에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여기저기가 온통 아파트 공사판이다. 원래 아파트가 지어질 저 마을에는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소소한 생산과 소비의 생태계가 있었을지 모르다. 전통 시장이 있었을 것이고, 아이들의 코 묻을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구멍가게도 있었을 것이고, 마을 사람들의 대소사에 올려질 떡을 공급하는 허름한 방앗간도 있었을 것이고, 어두침침한 전파사에는 납과 인두기만 있으면 무엇이든 고치는 순돌이 아빠가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을 ‘재생산’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비자들의 필요가 곧 생산이 되고, 그렇게 생산된 필요는 정이라는 덤이 얹어져 거래되는… 우리가 “응답하라, 1988”에서 느꼈음직한 불편하지만 그래도 뭔가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러한 마을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생태계 말이다.


아파트라는 괴물은 오랜 시간 필요와 생산이 소소한 성공과 실패의 경험으로 축적된 이러한 마을의 생태계를 한방에 쓸어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탐욕스럽고 거대한 소비집단이 들어선다. 거대하고 탐욕스런 소비집단인 아파트의 거래 상대는 그만큼 탐욕스럽고 거대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거대 자본이 운영하는 대형 마트는 아파트와 깔맞춤이다. 대형 마트에는 없는 것이 없다. 자본이 만들어 낸 온갖 상품들이 조명을 받으며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필요한 것만 소비해서는 곤란하다. 지금은 소비자가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시대가 아니라, 자본이 이윤을 위해 과잉 생산한 것을 소비자가 과잉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다양한 식당들이 모여 있는 푸드코트는 소비를 위한 재충전의 공간이다. 밥을 먹으러 와서 소비하고, 소비를 하기 위해 배를 채운다. 이른바 소비가 주도하는 성장의 수레바퀴 위에 올라탄 우리는 경쟁적으로 중복과 과소비를 탐하는 과정에서 소득 경쟁이 일자리 경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져 버렸다.

대형마트와 전통시장의 주차장 비교

공동체로 엮여있는 마을은 구질구질하고 불편하지만, 아파트와 대형 마트는 세련될 뿐만 아니라 분리의 안락함을 선사한다. 한마디로 ‘쿠울~’하다. 우리는 쿠울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구질구질한 관계를 편리한 소비로 대체하고 있고, 공동체가 지향했던 공공의 가치를 부수고 잘게 쪼갠 후,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파편을 골라 나눠 가졌다. 그렇게 공동체에서 분리된 개인이라는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가치에만 경쟁적으로 몰입한다. 이미 공공의 가치는 소멸되었고, 각자가 소유한 가치의 파편은 점점 공공의 가치에 준하는 지위를 점하기 위해 진격 중이다. 공공의 이익이 파편으로 갈라진 사회에서 나의 손해는 공공의 이익으로 가지 않는다. 또 다른 누군가의 사익이 될 뿐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관계로부터 진화한 인류가 아닐지도 모른다. 거대한 소비집단인 아파트의 안락함에 익숙해진 우리는 대자본과의 불평등한 거래관계 속에서 마치 솥에서 천천히 삶아지고 있는 개구리의 신세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질량은 상태 변화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계속 같은 값을 유지하며, 물질은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고 그 형태만 변하여 존재할 뿐이라는 물리 법칙이다. 물리 법칙은 대부분 사회과학에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파트에 살며 누리는 안락함의 대가는 무엇일까? 우리를 물속에 집어 놓고 서서히 열을 가하고 있는 것은 누구이며, 우리가 안락하게 멸종해가는 그 과정과 결과로 득을 보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아파트 확대에 따른 이해득실

아파트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안락함’이라는 이득을 본다. 그렇다면 그 이득과 관련되어 있는 자본, 공공, 개인의 물질적, 정신적 이해 득실 관계를 한번 따져 보자. 아파트를 중심으로 토건 자본은 어마어마한 이윤을 챙긴다. 토건 자본의 과잉된 이득은 낙수효과가 되어 다양한 영역과 카트텔을 형성한다. 소위 정경유착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나아가 자본가가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자산을 소유한 기득권 계층은 아파트를 통해 양극화의 이득을 본다. 반면 이미 주거 소비의 기준이 되어버린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해 개인들을 어마어마한 가계부채를 기꺼이(?) 감당한다. 주거 형태로서 아파트가 증가하며 공공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허울뿐인 경제 지표가 상승한다는 것 외에는 거의 없다. 오히려 분배로 이어지지 않는 경제 지표의 상승은 양극화를 초래해 사회문제를 심화시킨다. 아파트는 또한 위에 언급했듯 마을의 작은 생태계를 물리적으로 파괴한다. 마을 생태계 붕괴를 통한 공공의 상식이 어떻게 분화되어 개인화되는지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언급했다. 이제 공공의 필요성은 나에게 득이 될 때만 인정된다. 내가 손해를 감수할만한 공공의 이익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미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진 NIMBY의 본질이다.
아파트가 주거가 아닌 투자의 목적이자 수단이 된 것은 자본이 의도치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과였으리라. 이미 포화상태인 아파트를 확대하는 주거 정책은 가장 효과적인 소비주도 성장 전략이다. 이제 위의 표를 확대해 소비주도 성장에 따른 이해득실의 균형관계를 한번 살펴보자.

소비주도 성장에 따른 이해득실

소비주도 성장은 기대 소비에 부응하는 소득을 차지하기 위한 일자리 경쟁으로 이어져 자본의 노동비용을 감소시킨다. 결과적으로 자본의 이윤은 더욱 확대된다. 공적으로 그 의미를 잃은 경제지표는 상승할지 모른다. 평당 100만 원짜리 땅에 아파트를 지어 평당 1,000만 원짜리가 되면 그만큼 경제지표는 상승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과연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평당 100만 원짜리 땅을 가지고 있거나 그 땅에 세 들어 사는 사람 대부분은 쫓겨나고, 평당 1,000만 원을 지불할 능력이 있거나 어마어마한 가계부채를 감당하고라도 그 분리된 안락함을 소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체’되어 들어오는 것이 국가가 생각하는 경제성장이라면 뭐 할 말이 없지만... 신자유주의의 첨병 IMF에서는 이미 2015년에 부의 양극화가 경제 성장을 둔화시킨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토건이 주도하는 소비주도 성장은 아파트 값이 계속 오른다는 전제가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나름 문과라 디테일한 숫자에 매우 약하다. 아는 숫자가 1, 10, 100, 1,000밖에 없다. 만약 아파트의 실물가치(땅값 + 건축비)가 100이고, 기대가치가 1,000이라면 900은 뭘까?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 낸 거품이다. 거품을 걷어내는 순간 우리 경제는 바로 아작이 날 것이다. 그 거품은 실체가 없이 상상 속에 존재한다. 그 불확실성이 자본을, 그리고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안을 공공의 영역에서 함께 풀어갈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 아파트를 통해 공동체는 붕괴되었고, 개인의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추구해야 할 공공의 이익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대문이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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