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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an 19. 2020

시대진단을 위한 세 가지 툴

현대의학이 과학혁명을 바탕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현미경의 발명이 있었다. 인류는 현미경을 통해 질병의 원인이 신의 저주가 아니라 미생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 의(료과)학의 토대가 된 진단의학의 시작이다.

진단검사의학은 의학적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미경의 발명으로 혈액학이 발전하여 혈액 내 성분의 검사들이 시행되었다. 17세기부터 임상화학검사의 요구가 있어왔고, 18세기부터는 환자 혈액을 이용한 화학검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 20세기에는 분광광도계의 발전으로 의학에서 사용하기 쉬운 검사법으로 화학검사가 시행되었다. 콜레라의 대유행 이후 많은 환자의 진단에 필요한 미생물 발견 및 검사법의 발전으로 검사실에서 미생물을 검출하는데 기여 하였다.
이렇게 진단검사의학은 근간을 이루는 기초의학의 발전을 토대로 하나의 학문이 되었다. 인간 수명 100세를 앞둔 현 시대에 현대의학은 더욱 더 발전할 것이고, 그 발전의 길목에서 진단검사의학이 중요한 근거를 제시할 것이다(이현지 외, 2017 요약).

의사는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질병에 대한 '진단'을 바탕으로 어떻게 치료할지 판단하는 '처방'을 한다. 단순한 소화불량을 위암으로 진단한다면 정상적인 치료 행위는 불가능할 것이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이렇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진단을 선행해야 한다. 현대의학의 관심은 이제 진단과 처방의 단계를 넘어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예방의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들여다보는 사회과학은 자연과학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하다.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객체는 주로 상수화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객체인 인간은 쉽게 상수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1999년 호주의 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리차드 테일러(Richard Taylor)' 박사가 '잭슨 폴록'의 그림에서 프랙탈의 규칙을 밝혀낸 것처럼 자연의 규칙은 아무리 복잡해 보이더라도 증명 가능한 영역에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현재 쥐고 있는 손을 계속 쥐고 있을지, 아니면 펼 지는 연구를 통해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의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처방)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진단하기는 커녕, 주관적 신념으로 미래를 예단(예방?)해 오히려 변수를 증폭시켜 왔다. 사회문제를 처방하기 위해선, 개인적 경험이나 주관적 신념에 기초한 확신을 거두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진단하기 위한 노력을 선행해야 한다.

시대진단을 위한 세 가지 툴

그렇다면 사회문제를 어떻게 진단해야 할까? 나는 시대진단을 위한 세 가지 툴을 제안한다. 첫 번째는 사회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인 '수직적 인과관계'를 살피는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 현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사회문제는 반드시 그 원인이 과거에 숨어 있다. 두 번째는 '수평적 이해관계'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사회체계이론을 정립한 니클라스 루만은 "모든 체계는 사회의 필요성에 의해 출발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확대, 재생산에만 몰입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당면한 사회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선 각자 자신의 확대, 재생산에만 몰입하고 있는 사회적 체계들이 공유하고 있는 수평적 시간 속에서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살펴야 한다.

교육체계의 자기서술, 즉 교육의 성찰이론인 교육학에게 교육은 '모든' 것이다. 교육은 오로지 교육의 관점에서, 경제는 오로지 시장의 관점, 정치는 오로지 정치의 관점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핀다. 예컨대 정치 체계가 '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 '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을 양산했다.'고 비난할 때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교육체계는 각 체계가 나름의 필요와 수요에 따라 다른 체계의 성과, 이 경우 교육적 성과를 수용하는 특성을 인정하기보다,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전상진・김무경, 2010: 242-243 요약).

마지막으로 사회문제를 바라볼 때 주관과 객관을 통합하여 인식해야 한다. 가끔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르게 나를 인식한다. 그게 당연하다. 그래서 가끔은 억울하기도 하고, 더 가끔은 고맙기도 하다. 그 인식이 나한테 이익이 된다고 해서 맞고, 해가 된다고 틀린 것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내가 주장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인식하는 내가 통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난 교육 전문가나 관료, 그리고 정치인들이 의도적으로 이 사회를 벼랑끝으로 끌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 행정, 정치 체계의 밖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교육, 행정, 정치 등이 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내부적 관점(internal point of view)"과 "외부적 관점(external point of view)"(Kieserling, 2004: 48)으로 표현할 수 있는 두 가지 서술 방식은 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기능 분화의 결과다. 배타 분화된 근대사회의 각 부분 체계는 이중적  서술의 대상이 된다. 기능 체계의 소속원으로서 성찰이론들은 내분적 관점에서, 무소속인 사회학은 외부적 관점에서 각 부분 체계를 관찰한다. 체계의 자기서술에서 나타나는 대상과 서술자(성찰이론)의 관계는, 루만이 표현한 바처럼, "충성과 긍정의 관계"다(Luhmann, 1997: 965). 자기서술은 "각 기능에 상응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회의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인 방식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서술의 중요한 쓰임새는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능 체계의 정당화에 있기 때문이다(전상진・김무경, 2010: 242).


그렇기 때문에 사회문제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내부서술에만 몰입할 것이 아니라, 각 체계가 충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한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는 외부서술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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