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사회학 #32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장하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보다 세탁기의 발명이 더 혁신적이라고 주장했다. 처음에 난 장하준의 주장이 괴변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우리의 일상 속에 침투해 있는 인터넷보다 세탁기의 발명이 더 혁신적일 수 있단 말인가! 장하준은 심지어 인터넷이 만든 변화는 전보가 만들어 낸 혁신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비꼬았다. 1866년 전보가 개통되기 전에는 대서양을 건너 소식을 전하는 데는 무려 2주나 걸렸다. 전보는 300 단어짜리 편지를 보내는 시간을 2주에서 7~8분으로 2,500배 넘게 단축했지만, 인터넷은 전보 다음에 발명된 팩스보다 고작 100배 정도 빨라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탁기는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탈출시켰다. 1890년대 말까지만 해도 35세~44세의 백인 기혼 여성이 집 밖에서 일하는 비율은 불과 몇%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는 80% 이상의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해 일을 하고 있다. 전보와 마찬가지로 사회에 미친 영향력만 놓고 본다면 확실히 인터넷은 세탁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해리포터에서 심쿵한 귀여움을 보여주었던 헤르미온느, 엠마 왓슨은 훌륭한 페미니스트로 성장해 2015년 UN에서 남성들에게 성평등 참여를 호소하는 'HeForShe" 캠페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9년 엠마왓슨이 영화 "미녀와 야수"의 벨 역으로 출연한다고 하자 허리를 잔뜩 졸라맨 중세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연기해 낼지 이목이 집중되었다. 엠마 왓슨은 "미녀와 야수"에서 원작 애니메이션에 등장하지 않는 특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벨이 빨래를 하는 장면에서 빨래가 든 통을 말이 굴리는 재래식 세탁기를 등장시킨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며 난 과연 엠마 왓슨다운 타협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엠마 왓슨은 그 유명한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처럼 전통적인 중세의 여성상에서 벗어난 벨의 모습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1970년대 스페인어 교과서에는 “라틴 아메리카에는 가정부가 없는 사람이 없다”라는 예문이 있었다고 한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이 말은 가정부도 가정부를 고용해야 한다는 논리적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단지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 왜 스페인어 교과서에 그런 예문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인건비도 같이 올라간다. 전도연이 주연한 "하녀"라는 영화는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의 대한민국이 시대적 배경이다. 스페인 교과서에 실린 예문은 스페인에 비해 매우 저렴한 라틴 아메리카의 인건비를 표현한 문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탁기는 여성들을 위해 만들었을까, 아니면 비싸진 인건비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었을까? 중국의 건설현장에서는 포크레인 하나를 부르는 비용보다 100명의 노동자에게 땅을 파게 하는 게 비용이 더 적게 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만약 중국의 인건비가 올라가면 건설 자본가는 100명의 노동자 대신 한 대의 포크레인을 쓸 것이다. 그러면 포크레인 대신 땅을 팠던 100명은 실업자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기술 혁신은 인권 신장이 아닌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본의 욕심이 그 동기였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24살의 꽃다운 청년, 김용균 씨가 사고로 목숨을 잃는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들으며 난 지금의 기술로 인간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노동을 인공지능이 대체할 순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려면 세탁기가 가정부를 대체한 것처럼, 화력발전소 노동자의 인건비가 기계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비싸져야 한다. 마치 패스트푸드 알바를 빠르게 대체해 가고 있는 KIOSK처럼...
이동건의 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 등장하는 유미의 남친이자 떡볶이집 사장인 바비는 샤워기의 물 온도를 조절하며 알바를 어떻게 대할지 고민한다. 알바에게 따뜻하게 대하자니 일을 게대로 안 할까 봐 걱정이 되고, 너무 차갑게 대하자니 금방 그만둘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대로 최저 임금 1만 원 시대가 열린다면, 그리고 알바를 해도 생활이 가능한 시대가 된다면, 지속 가능한 불행을 감내해야 하는 정규직 일자리 경쟁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2016년 알파고가 인간 바둑 최고수인 이세돌을 이긴 후 인공지능은 전방위적으로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 영역을 인공지능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세계의 유력 인사들이 모여 경제의 고민거리는 나누는 다보스 포럼에서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5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거라며 매년 공포감을 부풀리고 있다. 고양이가 쥐를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쩌라구? 인간이 기계와 일자리 경쟁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기계가 대신해 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기계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기계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노는 일”이다. SF영화에서처럼 인공지능이 자주성을 갖게 되기 이전까지는... 더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게 노는 일은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놀이의 정보를 공유하고 널리 확산시키는 것은 이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다. 그 일은 누가 가장 잘할 수 있을까? 백수는 마치 여성이 세탁기로 인해 가사 노동에서 해방된 것처럼, 인류를 기계와의 일자리 경쟁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여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새로운 노동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