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7
근대교육은... '의도와 무관'하게 자본주의의 논리에 기여하면서 기생한다. 모든 사회 체계 중 오직 교육만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교육의 영향력은 여타의 사회 체계를 압도한다. 근대교육은 인간을 자본주의형 인간으로 ‘사회화’시키는데 가장 크게 기여해 왔으며, 자본주의에 필요한 인간을 ‘선발’하는 데 앞장서 왔다. 사회화가 근대 이전에도 있었던 교육의 기본 기능이었다면, 선발 기능은 근대교육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선발의 기준은 오직 자본이 추구하는 이윤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인류가 필요로 하는 노동보다, 이윤을 만들어 내는 노동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코로나 속에서 사람들이 깨달은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에센셜 임플로이(essential-employees), 영국에서는 키워커(key-worke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두가 생존하는 데 기본이 되는 필수 노동을 한다는 점요. 의료진, 음식 파는 가게 직원, 배달노동자, 양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지금까지 저임금으로 일해온 노동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록다운 속에서 이런 말들이 나와요. ‘이제 보니 투자은행가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이들 없으면 못 살겠구나!’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일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해요(장하준, 2020/5/7, 경향신문).
교육은 또한 '의도와 무관'하게 자본주의라는 간신 나라를 지키는 충신 역할을 수행한다. 사회 시스템이 아무리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육은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며, 나아가 그 시스템을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 선발한다. 얼마 전 우연하게 혁신교육지구를 하던 원년 멤버 몇 명이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교사 출신의 (전)교육정책보좌관은 밑도, 끝도 없이 교육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지금은 야인으로 살고 있는 다른 (전)교육정책보좌관은 왜 비인격체인 교육을 살려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그렇다. 교육은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니다. 그저 사회를 위해 작동하고 있는 물리적 수단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자신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법적 인격체를 만든 것과 다르지 않은 이유로,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4항에서는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인 교육에 자주성을 부여했다.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헌법 제31조 4항)
이 지점에서 부탁하건대 제발 오해하지 마시라! 교육이라는 사회체계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일 뿐, 나 또한 마르크스처럼 사회구조의 피조물일 뿐인 교사 개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할 의도는 단 1도 없다. 집단의 문제를 쉽게 개인과 일치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난 개인이 집단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구조의 피조물이기는 하나, 집단의 문제가 곧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오히려 우리는 집단의 문제와 책임을 개인과 분리하는데 더 익숙하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집단인 국민과 나를 일체화시켜 자신의 문제라고 반성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개인과 집단의 일체감은 집단이 가지고 있는 권위에 비례한다. 집단이 가지고 있는 권위가 강할수록 그 집단에 속한 개개인은 집단의 권위가 곧 자신의 권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한민국의 최상층에 존재하고 있는 검사집단이다. 오죽하면 ‘검사동일체’라고 했을까!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개인으로서 불쾌감이 느껴진다면 당신은 꽤 권위가 있는 집단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기준’과 ‘개인차'가 존재한다. 권위의 기준은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나아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가치'일 수도 있다. 개인차에 대해 부연하자면, 일반적으로 그 집단의 기대 수준에 못 미치거나, 집단 의존도가 높은 개인일수록 더욱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외부 공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집단의 권위에 부합하는 내용과 자격을 충분히 갖춘 개인에게 외부의 공격은 오히려 집단 내부에서의 차별적 우위를 점하는 좋은 기회가 되지만, 집단의 외곽에 위치해 있거나 표면에 겨우 묻어 있는 개인은 자칫 외부의 흔들기에 자신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처럼…
아이러니한 건 시민들이 정치체계를 비판하면 정치인은 그래도 시민의 편에서 같이 열을 올리는데, 시민들이 교육이나 학교를 비판하면 교육의 3주체 중 주로 교사들이 불쾌감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흔히 교육의 3주체를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학생이라고 한다. 만약 교육의 주체 중에 외부의 비판이나 비난에 불편함이 아닌 후련함을 느끼는 주체가 있다면 교육의 3주체라는 말은 그저 허울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교육은 신성하지도, 그렇다고 하찮지도 않다. 얼마 전 평교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된 강모 의원은 동료 교사들과 『혁신교육지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다. 학교가 마을과 함께 하고 있는 정책의 책을 교사 출신들이 모여 낸 것도 의아했지만, 책의 표지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혁신교육지구를 “학교는 수업 같은 정규 교육 과정에 집중하고, 방과 후에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구청이나 시에서 맡는 거야.”라고 마치 가르치듯 정의했다.
혁신교육지구에는 교사뿐만 아니라, 지자체 공무원, 그리고 학부모를 비롯한 다양한 마을 활동가들이 주체로 참여하고 있는 교육정책이다. 그리고 교육 3주체 중 학생들의 참여는 참여라기보다는 차라리 시혜에 가깝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멋진 교육 정책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준비나 해!
혁신교육지구가 마을과 학교의 협력을 통해 지향해야 할 최종 목표는 교육의 대상으로 전락한 학생을 주체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현재 교육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의사[醫師]가 환자의 의사[意思]는 물어보지도 않고, 의사[醫師] 자신을 위해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적어도 혁신교육지구가 무엇인지 이야기하려면 기본적으로 혁신교육지구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를 담았어야 했다. 단지 교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면, 단행본이 아니라 교육청 내부 자료로 만들거나...
적어도 혁신교육 이전, 대한민국에서 학교는 마을 속에 존재하는 갈라파고스였다. 마을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은 무시한 채 중앙에서 정한 교육과정을 마을에 관철시키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었다. 마을이 냄새가 폴폴 나는 개천이었다면, 교육은 그 냄새나는 개천에서 승천할 한 마리의 용을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근대 이전의 교육과 근대 이후의 교육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선발 기능의 유무이다. 근대 이전엔 교육을 통해 지배계급인 귀족을 선발하지 않았다. 근대교육은 초기에 고착된 중세의 계급 질서를 흔드는 역동성을 보여 주었지만, 지금은 실력주의(meritocracy)로 이어지며 사회의 역동성을 방해하는 가장 단단한 구조가 되었다.
이러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바로 혁신교육이다. 혁신교육은 다양한 교육의 주체들이 교육 정책에 참여하는 것이며,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마을(일반행정)과 학교(교육행정)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혁신교육지구란 무엇인가?』를 쓴 교사 출신의 저자들은 일반행정과 교육행정의 분리로도 모자라 다시 교육을 '교(가르치는 것)'와 '육(기르는 것)'으로 분리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돌봄을 지자체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명분으로 교육 선진국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교육 선진국에서는 돌봄을 지자체가 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 선진국에서는 돌봄뿐만 아니라 교육도 지자체가 책임진다. 교와 육의 분리를 주장하기 위해 교육 선진국의 사례를 들먹이는 건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을 미리 정해 놓고, 그 입장에 필요한 정보만 편집해 근거로 제시하는 가장 일반적인 패턴의 가짜뉴스다. 국가가 보장하는 교육에 대한 권리는 그대로 두고, 돌봄만 따로 떼어 지자체가 맡아야 한다는 것은 혁신교육지구의 가치에도 반하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을 제일 잘하는 건 역시 조선일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팩트만 편집해 주장에 활용한다. 그러면서 가짜뉴스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 팩트의 일 부분일 뿐, 거짓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