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교육을 둘러싼 논쟁은 언제나 뜨겁다. 진보 대 보수, 학생 중심 대 교사 중심, 평등 대 수월성. 그러나 이 논쟁의 열기 속에서 정작 교육 현실은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반 일리치, 한나 아렌트, 니클라스 루만. 이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언어로 교육을 말했지만, 공통점이 있다. 이데올로기적 좌표 위에서 교육을 판단하는 방식 자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학교 제도가 학습을 오히려 왜곡한다고 주장했다. 학교가 존재함으로써 사람들은 학습이란 학교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 내면화하고, 스스로의 앎의 능력을 불신하게 된다. 그런데 이 비판은 진보 교육론자들에게도 불편하다. 학교를 더 민주적으로 개혁하자는 주장 자체가 이미 학교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을 외칠수록 제도는 강화된다.
아렌트는 달랐지만 결론은 비슷하게 불편하다. 그는 아이를 세계에 맞이하되 세계 자체는 어른이 책임지고 보존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이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교사의 권위를 해체하는 진보 교육은, 아렌트에게는 오히려 아이를 세계로부터 방치하는 것이었다. 권위의 회복을 말하는 순간 진보 진영은 선을 그었다.
루만은 아예 진보와 보수라는 코드 자체를 체계이론 바깥에 두었다. 교육을 정치적 이념의 언어로 번역하는 순간, 교육체계 고유의 작동 방식은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방관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엄밀함이었지만, 이념의 언어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보수의 편으로 읽혔다.
역설은 여기 있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데올로기를 소비하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교육 현실을 가린다.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격렬할수록, 그 논쟁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교육은 조용히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일리치, 아렌트, 루만이 불편한 이유는 그들이 그 가려진 곳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나는 일리치와 아렌트, 그리고 루만의 공통점이...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관정에서 사회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셋 다 교육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지만, 루만의 표현에 의하면 교육의 관점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자기 준거성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주의자(이런 표현이 있나?)들 입장에서 그들의 논거가 보수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첫째,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학교 자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대사회에서의 지위를 비판했고, 그 비판의 대상 가운데 위치해 있는 소위 스스로를 진보적 교육자, 또는 교육을 통해 세상을 진보시키려는 사람들은 일리치를 인용하기 꺼려하는 것 같아.
둘째, 아렌트는 교육의 위기에서 전통적인 진보교육의 프레임을 깨는데, 보통 진보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교육을 사고하지만, 아렌트는 교사의 권위를 강조했던 것 갈아(이 부분은 사실 잘 기억이 가물가물해, 오래전에 읽은 텍스트라) 앞에 얘기한 진보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조하지 않는 것 같아. 선을 그었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루만 또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정치 논쟁이나 실증주의와 비판이론 사이에서 벌어지는 학문적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말리지 않음으로 해서... 보통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방관함으로써 보수의 편을 들었다고 오해하는 것 같아. 사실 베버도 당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학생들로부터 엄청 비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는데(팩트 체크 요망)
난 그러한 이데올로기주의자들로 인해 오히려 이데올로기가 실종되고, 전혀 다른 프레임 위에 놓여 있는 현실을 더욱 미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내용을 그럴듯하게 정리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