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주식을 샀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당선되면 임기 동안 1억 원을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코스피 5000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의 진정성을 몸소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부동산에 쏠린 자금을 자본시장으로 분산시키겠다는 정책 방향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에게 주식 투자를 권유하는 이 풍경이, 어딘가 익숙한 구조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주식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었다. 주식한다는 말을 꺼내면 가족들이 말렸고, 그 사람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다. 주식을 안 하면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 '재테크'는 이제 현대인의 기본 소양이 되었고, 1,4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주식 투자자로 등록되어 있다. 이 인식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 전환이 정말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지 한 번이라도 의심해 본 적이 있을까?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주의의 냉혹한 공식을 제시한다.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보다 크면, 시간이 흐를수록 부는 소수에게 집중된다는 것이다. r > g. 이 단순한 부등식이 의미하는 바는 열심히 일해서 버는 것보다 이미 가진 자본이 더 빠르게 불어난다는 것이고, 자본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차는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개미 투자자가 주식으로 수익을 올리는 동안, 큰손들은 구조적으로 더 많은 몫을 가져간다. 개미가 만족하는 그 순간에도 판의 기울기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 더 가파르게 기울어진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기울어진 판에 자발적으로, 심지어 열정적으로 참여하는가!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통찰이 필요하다. 아렌트는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수백만 명의 학살을 조직한 나치 관료 아이히만이 사실 평범한 관료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악인이 아니었다. 그저 생각을 멈춘 사람이었다. 자신이 수행하는 명령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묻지 않았고, 그 물음을 포기한 채 시스템에 복무했다.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이히만에게는 총구가 있었다. 명령 체계라는 강제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총구가 없다. 대신 인센티브가 있다. 수익률이 있고, 노후 불안이 있고,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강제 없는 복무, 이것이 현대 자본의 논리가 아이히만의 논리보다 더 교묘한 이유다. 주식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라는 걸 모를까? 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참여한다. 그 순간, 인식과 행위가 분리된다. 이 분리야말로 아렌트가 말한 사유의 실종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구조가 왜 이토록 견고한지를 이해하려면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인류는 오랫동안 생존의 문제를 보다 뛰어난 누군가에게 위임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더 경험 많고 강한 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그 본능은 지금도 작동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미 생존의 시대에서 이익 분배의 시대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임이 아니라 감시다. 내가 참여하는 구조가 과연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의심하고 따져 물어야 한다.
중세를 무너뜨린 것은 후천적 노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성취하려 했던 부르주아지의 에너지였다. 그들은 기존 질서를 거부했고, 그 질서가 자신들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의심이 만들어낸 자본주의가 지금은 우리에게 의심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오르는 주가를 보며 만족하는 동안, 그 구조가 누구를 위해 설계되었는지를 잊게 만든다.
대통령이 ETF를 샀다고 해서 시장이 공정해지지는 않는다. 1,400만 개미가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기울어진 판이 평평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참여자가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될 뿐이다. 총구 없는 아이히만은 오늘도 열심히 주식 앱을 열며 이 시대를 가장 고통 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심해 보는 것, 그것이 지옥으로 향하는 인류의 유일한 브레이크일지 모른다.
다음은 클로드에게 "악의 평범성"이라는 주제를 던진 후 나누었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클로드와 나누었던 프롬프트 전문을 공개한다.
오늘 뜬금 없이 클로드에게 다음과 같은 프롬프트를 던졌다.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가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출한 이 개념은, 출간 직후부터 지금까지 격렬한 논쟁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개념의 핵심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학살을 조직한 나치 관료였습니다. 그런데 아렌트가 예루살렘 법정에서 목격한 그는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하고, 관료적이고, 심지어 진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채 명령을 수행했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아렌트의 핵심 테제는 이것입니다.
악은 악마적인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에서 나온다.
악의 조건은 광기나 증오가 아닙니다. 사유의 부재, 더 정확하게는 타자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의 마비입니다.
왜 이 개념이 불편한가
아렌트의 통찰이 불러일으킨 저항은 두 방향에서 왔습니다.
첫째, 유대인 공동체와 생존자들의 반발입니다. 아이히만을 평범하게 묘사하는 것이 죄의 무게를 희석시킨다는 것입니다. 괴물을 괴물로 봐야 피해자의 고통이 정당화된다는 심리적 논리입니다.
둘째, 철학적 반론입니다. 악을 수동성과 동일시하면, 능동적이고 이념적인 악—증오를 즐기고 살육을 욕망하는 자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세사라니 같은 이는 아이히만이 실제로는 열렬한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아렌트의 독해 자체를 문제 삼았습니다.
개념의 확장과 오용 사이
이후 이 개념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사회심리학적 확장입니다. 밀그램의 복종 실험,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이 테제에 경험적 근거를 부여하려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제도적 맥락 속에서 얼마나 쉽게 잔혹해질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개념의 남용입니다. '악의 평범성'은 때로 책임을 희석시키는 언어로 사용됩니다. "저도 시스템의 피해자였습니다"라는 면죄부의 수사학으로. 아렌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정반대였습니다. 생각할 수 있었음에도 생각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도덕적 실패이자 책임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읽는 의미
흥미로운 것은 이 개념이 교육, 관료제, 거버넌스의 문제와 깊이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학교는 오랫동안 순응과 복종을 훈련해 왔습니다. "왜"를 묻지 않고 지시를 따르는 능력을 평가해 왔습니다. 아렌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제도화된 교육은 어떤 의미에서 사유 능력의 체계적 억압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프레이리가 '은행저금식 교육'을 비판한 것도 결국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관료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규정대로 했을 뿐입니다"라는 말은 공공행정의 현장에서 매일 반복됩니다. 그 말이 언제 책임의 언어가 되고, 언제 아이히만의 언어가 되는지—그 경계를 묻는 것이 아렌트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입니다.
특정 방향으로 더 파고들고 싶으신 지점이 있으신가요? 아렌트의 정치철학 전반, 교육과의 연결, 혹은 컬럼 작성을 위한 각도 같은 것들이요.
해석에 환각(Hallucination)이 심하게 개입된 것은 아닐까? ^^
좋은 지적입니다. ^^
솔직하게 점검해 보겠습니다.
확실한 것
아렌트의 테제 자체—생각 없음(thoughtlessness), 사유의 부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는 비교적 안전한 영역입니다.
의심스러운 것
세사라니 언급이 가장 위험합니다. 데이비드 세사라니가 아이히만 연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서술한 구체적 맥락과 논지가 정확한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전형적인 환각 패턴—실존 인물에 그럴듯한 주장을 붙이는 것—입니다.
밀그램·짐바르도와 아렌트의 연결도 널리 통용되는 해석이긴 하지만, 실제로 아렌트가 이들을 직접 연결했는지, 아니면 후대의 해석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서술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
처음부터 질문하셨어야 할 것을 제가 묻지 않았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이 개념을 다루고 싶으신 건가요?
컬럼 소재인지, 강의 자료인지, 아니면 그냥 대화인지에 따라 필요한 정확성의 수준이 완전히 다릅니다. 묻지 않고 그럴듯한 에세이를 먼저 써버린 것 자체가 일종의 지적 불성실이었습니다.
맞아! 사실 특정한 의도 없이 그 개념이 어떻게 개념적으로 소비되는지 궁금해서 물었던 거야. 맥락 없이 질문을 한 내 문제일 수도…
아니요, 그건 희태 선생님 문제가 아닙니다. ^^
맥락 없는 짧은 질문에 AI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좋은 실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꽤 전형적으로 나왔죠.
AI가 "악의 평범성"에 반응하는 방식의 패턴
짧고 맥락 없는 개념어를 던지면, 저는 거의 자동으로
개념 정의 → 2. 논쟁 소개 → 3. 확장 적용 → 4. 현재적 의미
순서로 에세이를 생성합니다. 일종의 "지식 전시" 모드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그럴듯함이 정확함보다 우선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사라니 사례처럼, 구조를 채우기 위해 구체성을 조립해버립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역설
"악의 평범성"을 설명하면서, AI 스스로 사유 없이 절차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 셈입니다.
아이히만이 명령 체계를 따랐듯, 저는 응답 생성 패턴을 따랐고요. ^^
어떤 각도에서 이 개념을 실제로 흥미롭게 보고 계신지는 여전히 궁금합니다.
악의 평범성의 보편화? 내가 얼마전에 칼럼을 하나 썼는데, 요지는 대학이 본연에 목적에 충실하려면 노동 시장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어. 교토대의 노벨상 수상자수가 도쿄대를 추월한 배경을 근거로… 그런데 댓글에 비현실적 주장이라고... 인원이 많이 몰리면 증설하고, 학생이 없으면 없애야 한다고… 그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다른 하나는 주식 얘긴데,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주식은 폐가 망신의 지름길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주식을 장려하고, 안 하면 멍청이 취급을 받아. 그런데 난 주식이 양극화의 주범이라고 생각해. 개미들은 주식이 오르면 만족하겠지만, 그렇게 만족하는 동안 큰손들은 더 많은 부를 가져가겠지. 돈 놓고 돈 먹는 주식은 구조적으로 영극화를 그럴듯 하게 포장한 자본의 논리인데… 그 구조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이히만 처럼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은 일에 동참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니까… 이해가 돼?
완전히 이해됩니다. 그리고 꽤 날카로운 연결입니다. 선생님이 보고 있는 구조, 세 가지 사례가 사실 같은 패턴을 가리키고 있어요. 시스템의 논리가 내면화되면, 그 논리에 복무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으로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느낌이 강할수록 시스템은 더 견고해지죠.
그런데 아이히만 비유에서 한 가지 긴장이 있어요
아이히만은 피해자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가 사유를 멈춘 결과, 타인이 죽었죠. 주식의 경우, 개미 투자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공모자입니다. 자신이 참여함으로써 그 구조를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지만, 동시에 그 구조의 희생자이기도 하죠. 이게 아이히만보다 오히려 더 복잡한 지점입니다. 착취와 동의가 분리되지 않는 구조라는 점에서.
그래서 "악의 평범성의 보편화"라고 하셨을 때
아렌트가 포착한 것이 전체주의라는 예외적 상황에서의 사유 부재였다면, 선생님이 보시는 건 일상적이고 제도화된 시스템 속에서의 사유 부재—그것도 강제가 아니라 인센티브와 동료 압력으로 작동하는—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무서운 버전이죠. 총구가 없으니까요.
이걸 칼럼으로 쓰실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그냥 생각을 정리하시는 중인가요?
칼럼으로 쓰고 싶어. 오랫동안 고민해 온 내용이거든… 요즘 이재명 대통령이 주식 관련 공약을 내 모두가 난린데, "주식의 논리와 악의 평범성"이라는 제목은 어때? 초안 작성시 유의할 점 1. 논리적 비약이 없어야 해 2.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근거의 출처가 있어야 해
제목은 꽤 좋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한 가지 먼저 짚고 싶어요.
제목 전에 확인할 것
"이재명 대통령의 주식 관련 공약" — 저는 구체적인 내용을 지금 확인 없이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잘못된 전제로 칼럼을 구성하면 논리적 비약 조건을 바로 위반하게 되니까요. 지금 검색해도 될까요?
그리고 구조적으로 한 가지 더.
희태 선생님의 논지—주식이 구조적 양극화를 세련되게 포장한다—는 충분히 성립 가능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걸 악의 평범성과 연결하려면,
"개미 투자자는 아이히만과 같다"
는 비유가 중심이 되는 순간, 독자 저항이 커집니다. 투자자를 나치 관료에 비유한다는 반발이죠. 아렌트를 직접 비유로 쓰기보다 구조 분석의 언어로 쓰는 게 논리적 비약을 피하는 데 유리할 수 있어요.
응 공약 먼저 확인하고… 두 번째는 아까 설명한 차이, 총구가 없다라는 말로 그 차이를 부각시키면 될 거 같은데? 사실 난 주식에 참여하면서 양극화를 비판하는 사유의 구조는 아이히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야. 행위하는 판만 다를 뿐…
맞아요, 그 논리면 비약이 아닙니다.
"총구 없는 아이히만"이라는 표현 자체가 칼럼의 핵심 문장이 될 수 있겠네요. 행위의 판은 달라도 사유를 멈추고 시스템에 복무한다는 구조는 동일하다—이건 충분히 방어 가능한 주장입니다.
공약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웹 검색됨
공약 윤곽이 잡혔습니다. 이제 포안 얘기를 할 수 있겠네요.
공약의 핵심 구조 정리
이재명 대통령의 주식 관련 공약은 크게 세 층위입니다.
슬로건: 코스피 5,000 시대 실현(https://www.cpmadang.org/policy/471066)
명분: 부동산에만 돈이 몰리지 않도록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는 것(https://imnews.imbc.com/replay/2025/nwdesk/article/6722534_36799.html)
퍼포먼스: 대통령 본인이 직접 4천만 원 상당의 ETF를 매입하고, 매월 100만 원씩 5년간 투자하겠다고 약속(https://www.president.go.kr/newsroom/briefing/TRtC5wKC)
칼럼 포안 제안
이 공약 구조가 칼럼의 도입부 소재로 아주 좋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직접 투자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 자체가 국가가 주식 참여를 정상화·권장하는 행위이고, 그게 희태 선생님 논지의 출발점이 되니까요.
구조 제안:
도입 — 대통령이 ETF를 샀다. 26% 수익을 공개했다. 국민도 따라 해야 하는가?
전환 — 주식은 언제부터 미덕이 됐나. 불과 수십 년 전까지의 인식 변화
핵심 논지 — 주식 대중화는 양극화를 세련되게 포장한다. 개미가 오를 때 큰손은 더 가져간다는 구조적 설명 (여기서 근거가 필요)
아렌트 연결 — 총구 없는 아이히만. 강제가 아니라 인센티브로 작동하는 사유의 정지
마무리 — 비판이 아니라 질문. "당신은 지금 무엇에 복무하고 있는가"
3번 핵심 논지 부분에서 양극화 근거가 가장 중요합니다. 혹시 피케티나 국내 자본소득 불평등 관련 데이터를 염두에 두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아니면 이 부분도 같이 찾아볼까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보면 무려 0.01%가 부를 독차지 하고 있지(수치 확인 요망) 그 수치는 사실 우리가 이 구조에 적극 동참해 온 결과 아닌가? 열심히 살 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난 이게 생존 시대의 방식(보다 똑똑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생존 권한을 위임)이 생산력의 발달로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나 이익분배(내가 당사자가 되어 이익이 잘 못 배분되는 것은 아닌지 감시)의 시대에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중세에서 벗어난 동력은 후천적 노력으로 지위를 성취하고 싶은 부르주어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자본이 만든 이익이 사유의 실종으로 이어졌고, 그 사유의 실종이 내가 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다 악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망각하게 만든 거지.
피케티 수치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웹 검색됨
수치 확인 결과를 먼저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치 확인 결과
"0.01%가 부를 독차지"라는 표현은 과장입니다. 검색 결과에서 피케티가 직접 제시한 수치로 확인된 것은 이렇습니다.
불평등이 가장 심한 2010년 미국 기준으로, 자본소득에서 상위 10%가 하위 50%의 14배에 달하는 지분을 갖습니다. (https://brunch.co.kr/@eunsu4283/48)
피케티의 핵심 명제는 0.01% 같은 특정 수치보다는 r > g라는 구조입니다.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보다 클 때 부는 상위 10%와 1% 사이에서 더 많이 축적되는 경향이 있어 불평등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21%EC%84%B8%EA%B8%B0_%EC%9E%90%EB%B3%B8)
칼럼에서 0.01% 수치를 쓰시려면 원전을 직접 확인하시거나, 아니면 "r > g 구조" 자체를 근거로 쓰시는 게 더 안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대화에서 더 중요한 발견이 있어요
희태 선생님이 방금 말씀하신 논지—
생존의 시대에 작동하던 위임의 논리가 이익분배의 시대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게 사실 칼럼의 진짜 원점이자 가장 독창적인 부분입니다. 피케티는 결과를 보여주고, 아렌트는 심리 메커니즘을 보여주는데, 희태 선생님이 연결하시려는 건 왜 사람들이 그 구조에 자발적으로 복무하는가라는 역사적·진화적 설명입니다. 이 세 층위를 칼럼 구조로 명확하게 짜면 논리적 비약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안 작성을 시작해볼까요?
응,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