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 Script. 제목에 쓴 "미친 토끼"는 비어가 아닌 블로그 닉네임임을 밝힙니다.
얼마전, 우연히, 아무 생각 없이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기사?)이 의외의 주목을 받아 탑에 배치되었다.
모태관종에게 쏟아진 오랜만의 관심... 아마도 1등 공신은 내 글에 공감과 반론을 제기해 주신 여러 댓글러들인 거 같다. 그 중에 꽤 길고 진지하게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 계신데... 블로그에 장문의 글을 써 주셨기에, 나도 예의상 의견을 정리해 보았다. 아래는 네이버 블로그, "미친 토끼의 가출일기"에 올라온 글이다. 글이 저엉말 길지만, 링크한 글을 먼저 읽고 내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갑지기 존대?).
다음은 "미친 토끼의 가출일기"에 쓴 나의 댓글이다. 차암 쓰잘 데 없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안녕하세요. 낭만박사, 채희태입니다. ㅎㅎ
제 글을 모티브로 써 주신 장문을 글을 읽으며 저도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부채감이 들어 몇 자 적습니다.
투모로우라는 영화를 보면, 갑자기 닥친 빙하기를 피하기 위해 도서관에 들어가 니체의 책을 불쏘시개로 쓰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어떤 분이 이렇게 외치죠.
니체는 안돼!
인문학은 낡지 않는다는 제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쓰신 글 군데군데에 칸트의 정언명령을 소환하시는 걸 보며, 한동훈 님에게 계몽주의와 인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칸트만큼은 낡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맞은 뼈의 통증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어서 저도 슬쩍 한동훈님의 뼈를 건드려 보았습니다. ㅎ
저도 한동훈님께서 생각하시는 포스트 휴머니즘의 방향에는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스트 휴머니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글을 읽으며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게 생겼는데... 인공지능이 자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 판단하고 그 결과에 책임진다는 의미일 텐데, 그런 존재에게 합의되지 않은 가치관을 코딩으로 주입한다는 발상은 칸트의 두 번째 정언명령, 즉 "타자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원칙에 오히려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한동훈 님이 그토록 비판하시는 이스라엘-미국의 이념 강요와 내용만 다를뿐, 구조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무지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진정한 자의식이 있는 존재라면 윤리도 주입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군대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저는 군기 빡씨다는 군악대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새로 들어온 제 쫄병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학쭝아, 난 네가 맞아서 100% 하는 것보다, 스스로 50% 하는 게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스스로 잘 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제가 그 쫄병 때문에 고생한 일을 딸들에게 한 적이 있는데, 듣다듣다 답답했는지, 딸들은 이렇게 외치더군요.
아빠, 차라리 패!
동훈님도 글을 쓰시는 중간중간 삼천포로 빠지시는 거 같길래 저도 슬쩍 한번 다녀왔습니다. 중간에 하셨던 10원짜리 100개로 막걸리를 반복적으로 사셨던 이야기는 솔직히 공감이 쉽지 않았습니다. 슈퍼 주인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을 것 같고, 그 불쾌함이 인류의 감성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연결되는 논리도 선뜻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코딩 교육이 중요하지 않다고 한 건, 기계어를 배워야 한다는 의도 때문이지 수학적 논리력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말과 글에는 맥락이 숨겨져 있습니다. 가끔은 맥락과 무관하게 듣는 이의 역린을 건드려 물고 늘어지고 싶은 표현이 툭 튀어 나오면, 맥락보다 그 표현의 파편에 집착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다는 거 모르는 바 아니나... 제가 인문학은 낡지 않는다고 말한 것, 그리고 코딩 교육을 비판한 의도는 한동훈님이 쓰신 글의 맥락을 볼때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굳이 반론(?)을 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저의 반론이라고 보다는 표현만 다를 뿐, 저와 한동훈님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인문학은 낡지 않는다"는 표현은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문학을 홀대해 온 노동시장 논리에 맞서기 위한 수사적 은유였습니다. 제가 예전에 썼던 글의 파편을 잠깐 가져와 보겠습니다.
사실 철학(philosophy)은 말 그대로 "지식(sophia)“을 "사랑(philo)”하기만 하면 되는 학문이다. 그런데 왜, 언제부터 철학을 어렵게 느끼게 되었을까? 갈수록 현실과 멀어지고 있는 철학을 필자의 어설픈 상식을 대입해 설명해 보겠다. 철학을 구성하는 존재론(Metaphysics), 인식론(Epistemology), 가치론(Ethics)은 모두 철학이라는 애매하고도 모호한 학문의 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철학의 분자는 이미 수없이 많은 천재 사상가들에 의해 차고, 넘치도록 연구되어 왔다. 문제는 특정할 수 없는 철학의 분모다.
철학이 어렵고,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모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수렵과 채집을 했던 원시시대와 비로소 생산노동이 시작되었던 농경시대, 그리고 노동이 이윤을 넘어 다양한 이익으로 분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시대의 철학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대라고 하는 분모가 달라졌기 때문이다(출처: [조커는 정말 희대의 악마일까?]).
인문학도 철학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대라는 분모 위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해야 하고, 현재와 상호작용하지 않는 인문학은 죽은 인문학입니다. 이는 한동훈님이 말씀하셨던 낡은 인문학을 보수하고 정비해야 한다는 맥락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쓴 조잡한 글에 품격 있는 댓글로 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떤 분인지 궁금해 인터넷을 찾아보니 저랑 68년생 갑장이신 거 같더군요. 기회가 된다면 직접 만나 좀 더 진솔하게 서로의 뼈를 때려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