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운 Feb 13. 2021

기억받는 축복

영화, <프랑스여자>(2020) 리뷰

너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어. 언젠가 헤어지자는 연인에게서 끝인사로 건네받은 말이다. 그런데 마침표가 찍힌 기억이 어찌 좋을 수만 있으랴. 이 기억들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나의 미숙했던 과거를 꾸짖으며 떠오른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지. 이놈의 기억은 꼭 잊고 싶은 장면만 선명하다. 기억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나를 괴롭게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또 그만큼 가르친다. 삶을 단순하게 '탄생에서 죽음까지'라는 직선운동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반성하고 그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성장한다. 김희정의 영화 <프랑스여자> 역시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의 삶'에 당도하는 영화다.


영화는 프랑스의 한 술집에서 미라(김호정)가 프랑스인 남편 쥘(알렉산드르 구안세)에게 불륜 사실을 통보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무대는 한국으로 바뀌고, 미라는 함께 대학을 다니던 영화감독 영은(김지영)과 연극연출가 성우(김영민)와 재회한다. 그런데 그는 8년 만에 만난 대학 동창들의 대화에 잘 끼지 못하고,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조용히 자리에서 벗어나 술집 밖에 있는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놀랍게도 술집에는 조금 전까지 함께한 영은과 성우 대신 20년 전 대학생의 얼굴을 한 성우와 영은, 그리고 성우의 전 여자 친구이자 2년 전 자살한 후배 해란(류아벨)이 있다. 미라는 여전히 중년 여성의 몸 그대로지만 놀란 기색도 없이 자연스레 그들과 섞인다. 그리곤 성우와의 키스를 해란에게 들키는 장면을 끝으로 꿈에서 깨어난다. 이 시퀀스를 시작으로 미라의 '대학 시절', '프랑스 시절', '현재의 한국'의 세 이야기가 어지럽게 섞이며 전개되는데, 영화가 절정에 다가설수록 세 층위의 이야기는 점점 더 뒤죽박죽 뒤섞여 어느 순간에는 경계조차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시간과 공간, 현실과 기억과 꿈이 위태롭게 연결되는 장면들에서 유일한 알리바이는 미라의 신체다. 그런데 그는 세 가지 시공간 모두 조금씩 비껴가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보인다. 프랑스에서는 외국인이었던 그는, 한국에서는 왠지 프랑스가 더 어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과거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 영은과 상우가 늘어놓는 추억에도 끼지 못하고, 배우의 꿈을 포기한 자신과는 다르게 꿈을 직업으로 이어가는 그들의 대화에서도 미라는 이방인이다. 이 지점들에서 그는 조용히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보는데, 이 행위는 미라가 유일하게 자신의 육체가 현재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의 종반부에 이르러서는 호텔 방의 거울에서도 쥘의 모습이 나타나고 호텔에 찾아온 상우가 쥘로 겹치기도 하는 등, 거울 속에도 환상이 침범하면서 현실, 기억, 과거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게 된다.



<프랑스여자>는 마지막 순간에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온다. 첫 장면처럼 쥘에게 불륜 고백을 들은 미라는 다시 거울 앞에 서는데, 이때 영은에게서 온 문자를 통해 첫 장면과 다시 돌아온 첫 장면 사이의 과정이 사실은 미라의 망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곧이어 미라가 있던 술집에 테러가 발생하고, 무너진 건물에 깔린 미라는 죽음을 앞둔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영화 내내 미라를 괴롭히던 해란의 망령은 죽어가는 미라 앞에 나타나 "언니 일어나. 사람들이 왔어."라는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미라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눈을 뜬다. 어떻게 미라는 죽음의 순간에 해란의 망령과 화해할 수 있었을까. 세 층위의 이야기는 영화 내부에서도 언급되는 프랑수와 트리포의 영화 <쥴 앤 짐>처럼 각각 삼각관계를 이룬다(미라-성우-해란, 미라-성우-성우의 부인, 쥘의 내연녀이자 미라의 후배-쥘-미라). 주목할 점은 미라의 자리바꿈이다. 해란이 성우에게 그랬던 것처럼 미라는 쥘에게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는지 의심하고, 어느 순간 미라의 등에 생긴 흉터는 자살하기 전 자해한 경험이 있는 해란의 육체와 겹쳐진다. 마지막 순간, 죽음까지 눈앞에 두게 된 미라는, 해란이 죽어가던 과정을 그의 위치에서 체화하면서 죄책감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던 해란의 망령과 화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해란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온전한 화해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괴로워하는 미라와 영화의 혼란스러운 인과와는 별개로, 이 영화에는 기억과 삶의 환대가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바로, 영은이 미라에게 '바나나 우유'를 건네는 순간들이다. 영은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미라에게 거듭 말을 건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프랑스어가 아니라 모국어다.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의 "나의 조국은 모국어"라는 말처럼 무대가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뒤 영은과 미라가 나누는 일상적인 한국어 대화는, 외국어가 주는 경직을 무화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모국어로 이뤄지는 대부분의 대화는 기억의 공유다. 누군가의 기억과 내 기억이 연결되는 고리. 그 얕은 이음새에서 우리는 그 순간 우리가 거기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라가 즐겨 마시던 바나나 우유를 잊지 않고 선물하는 영은의 섬세함은, 나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당신에게도 남아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기억받는 축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스로 완전할 수 있다는 반쪽의 믿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