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7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운 Mar 13. 2021

여행의 이유


여행에는 많은 모습이 있다. SNS를 통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 새로운 도전을 위한 여행, 어떤 영화나 책을 보고 그 배경을 직접 눈으로 담기 위해 떠나는 여행, 가족 혹은 연인과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여행, 휴식을 위한 여행, 배우기 위한 여행과 먹기 위한 여행과 보기 위한 여행. 이유 없는 여행은 있어도, 목적 없는 여행은 찾기 힘들다.


팬데믹 이전, 나는 해외에서 체류 중이었다. 한국을 떠날 때 가장 많이 들은 안부 인사는 ‘몸조심해.’이고, 그다음이 ‘많이 배워와라’였다. 사람들은 여행에서 무엇을 배울지는 잘 몰라도 무엇인가는 배워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을 떠나는 순간과 집으로 돌아온 순간은 무엇이 되었든 달라야 한다고. 대부분은 이렇게 믿는다. 맞는 말이다. 여행에는 돈과 시간이 필요하고, 그에 비례하여 무엇인가를 얻어야 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은가.


그럼 난 무엇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걸까?


그런데 항상 무엇인가를 얻어와야 한다고 다짐하며 집을 나서지만, 결국 돌아왔을 때 나에게 남은 건 텅 빈 지갑과 미약하게 남아 있는 여행지의 이미지뿐이다. 단편적인 이미지도 함께 여행을 떠난 길동무가 있다면 나중에 ‘그땐 그랬지’라며 추억을 되새기는 순간마다 떠올릴 수 있겠지만, 주로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나에게는 여행지의 기억을 상기할 기회도 드물다. 더욱이 나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다녀야 한다는 강박으로 아침 점심 저녁을 시간 단위로 쪼개서 부지런히 움직이지도 않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보다 개인실을 선호하며, 게스트하우스에 묵어도 사람들이 모인 로비에 잘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고 며칠 뒤엔, 그 여행지의 기억들이 휘발되어 버린다.


그래도 난 여행을 떠난다. 물론 될 수 있다면 이번에도 혼자서. 나에게 여행은 새로운 공간을 찾는 행위다. 새로운 공간에 날 밀어 넣는 것. 그것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나를 지켜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일상이 요구하는 대응 방식 이외의 것을 요구하며, 그에 대처하는 나는 내가 처음 마주 서는 나다. 가장 최근 여행에서도 여러 번 느꼈다. 혼자가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외로움은 견디기 힘들다. 영어 실력은 뜻밖에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수준이며, 의외로 친화력이 좋다. 생각보다 계획적이었으며, 생활력이 괜찮다. 달라졌다고 생각한 나는 여전했으며, 몰랐던 나는 예전부터 그랬다는 걸 깨닫는다. 난 나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른다. 그래서 난 나로 살지 못한 순간들을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은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