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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Feb 27. 2021

탄자니아 통신

송편을 빚으며

추석 연휴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이 글이 지면에 실릴 걸 생각하면, 뒷북치고도 한참 뒷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박하지만 정겨웠던 이곳의 추석 풍경을 그려보고 싶다. 꽤 오랜 기간 바깥 생활을 했지만, 손수 송편을 빚어 본 것이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나답지 않게 그 일련의 일들이 즐거웠으니 말이다.

음베야의 한국인은 여덟 명에서 단기 체류자인 두 명의 처자가 합세해, 열 명으로 늘어났다. 

일부러 약속을 정하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보게 되는 데, 이런저런 이야기로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어떤 날은 20대인 창우 씨의 썸타는 얘기로, 어떤 때는 저마다의 여행 다녀온 얘기들로, 또 어떤 날은 한국의 정치 이야기로, 때론 타국에서 생활하며 겪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안이나 자신만의 노하우를 나누는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다. 터줏대감인 선교사님 가족이 있어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구성원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알고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유연함을 가진 탓이다. 이번 명절 행사도 이런 수다 끝에 나온, 송편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추석 고유의 색깔 덕분이었다. 


자유로운 이곳 분위기답게 식사 시간만 정했다. 그러면 각자의 스케줄에 맞춰 와서, 스스로 자리를 잡으면 그게 자신의 역할이 된다. 

늦은 아침을 먹고 선교사님 댁에 도착한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송편 재료를 앞에 하고 식탁에 앉았다. 니엘과 나엘(선교사님 딸과 아들), 그리고 새로 합류한 두 처자, 미래 씨와 경서 씨가 함께 한다. 선교사님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익반죽을 하는 동안, 설탕을 넣은 깨소금 소가 만들어지자 준비는 마쳤다. 

나이에 비해 사려 깊고 차분한 니엘은 방법을 가르쳐주니 금방 비슷하게 흉내를 낸다. 동생 나엘은 따라 해보지만 매번 야릇한 모양이 만들어진다. 여러 번 변신 로봇을 만들 듯 변형을 시키더니 드디어 기다란 모양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모두 악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정작 자신은 청소기를 만든 거라고 해서 폭소를 자아냈다. 


오랜만의 송편 빚기는 옛 기억을 불러온다. 부엌일에는 도대체가 맘이 없던 내게 송편 빚기는 유일하게 잠시의 놀이가 되었었는데, 오빠와 내가 빚은 송편이 제일 예쁘단 칭찬 때문이었을까? 그나마도 오래는 못하고, 약속을 핑계로 늘 도망을 나왔지만 말이다. 

결혼을 한 후에는 의무가 되었는데, 손이 크던 시댁 여자들은 뭐든 많이많이. 그중에서도 독신이었던 손위 시누이가 합류를 하게라도 되면 그 규모는 내 예상을 초월했다. 싫은 내색이라도 하면 바로 분위기가 싸늘해 졌으니, 그녀가 오는 게 참 부담스러웠었다. 한 끼 맛나게 먹을 만큼 즐겁게 만들고 치웠다면 놀이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욕심으로 노동이 되었고, 그 결과는 냉동고의 한편을 오랫동안 차지하곤 했다.


옆에서는 목사님이 가래떡을 뽑고 있다. 곱게 빻아놓은 쌀가루를 시루에 넣고 찐 후, 녹즙기의 노즐을 통해 내보내니 쫀득쫀득한 떡볶이 떡으로 변해 나온다. 물에 내려앉은 떡을 건져내 꿀에 찍어, 송편을 만들고 있는 우리 입에 넣어주는데 정말 추석 기분이 솔솔 난다. 떡 뽑기가 끝나자 이왕 하는 김에 흰 살 생선을 갈아 다진 야채와 잘 섞어 기름에 튀기자 수제 어묵으로 변신. 

부엌에서는 창우 씨의 필살기인 닭 요리가 오븐에서 익어가고, 수업 때문에 조금 늦게 합류한 학섭 선생님은 전을 부친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신자 씨의 부대찌개 냄새로 입에 침이 고여 오고.

선교사님은 솔잎 대신 바나나 잎을 깔고, 찜통 가에 밀가루 반죽까지 둘러 쪄낸다. 따끈한 송편을 한 입 베어 무니 달콤하고 고소한 참깨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 서로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며 함께 하는 시간.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예전에 없이 긴 휴가로 인천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여전히 거론되던 명절 증후군. 나의 추석 후기를 보며 한국의 지인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는데, 주부들은 여전히 명절이 부담이 되었고, 남편들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고 하소연했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인사 아닌, 인사 듣는 고역으로 괴롭다고 전해왔다.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고국에서 전해오는 인사로 추석인 걸 알뿐 그냥 지나쳤을  이곳의 명절이 한국에서의 명절보다 더 명절다웠던 건 자발적이고 자율적이었으며, 공평해서가 아니었을까?   



출처: https://gcinnews.tistory.com/3896 [금천마을신문 금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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