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과 선비의 유래와 신라 화랑, 그리고 재팬열도 사무라이에 대하여
신선(神仙)이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인간을 이야기한다.
흔히 선인(仙人)이라고도 한다.[출처: 나무위키]
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을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우리 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선바ᆡ’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선과 선비의 대강의 뜻일 것 같다.
하지만, 연원을 까마득한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신선과 선비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삼국사-김부식> 동천왕 21년조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왕검이 살던 집이 있는 곳이다. 또는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한다(平壤城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라는 기사가 있다.
단군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은 바로 <선인(仙人)>이었다는 단서가 이것이다.
<북부여기-범장> 해모수 8년조에는 "BCE 232년에 해모수가 옛 도읍의 오가(五加)들을 회유하여 마침내 공화정치를 철폐하였다. 이때 나라사람들이 단군(檀君)으로 추대하여 받드니, 이분이 북부여(北扶餘) 시조이다"라는 기사가 있다.
허나 이에 앞서 해모수 1년조에 "해모수는 본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시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天王郞) 같았다"라는 기사가 있다.
북부여를 개국한 해모수는 <천왕랑(天王郞)>이었다는 단서이다.
이보다 앞서 <삼국유사-일연>을 보면 "환웅천황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에서 신시배달국을 개국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 무리 3천을 <제세핵랑(濟世核郞)>으로도 해석한다[출처: 이유립 <대배달민족사>]
핵랑은 낭도 중에서 핵심이 되는 자를 칭하는 것으로 이 앞에 세상을 구한다는 제세를 붙인 말이다.
또한 고구리를 개국한 고추모는 알다시피 백발백중의 명궁으로 그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동부여를 탈출할 때 오이, 마리, 협보라는 수하와 함께 탈출했다.
이를 미루어 고추모도 틀림없이 준군사조직인 낭도를 거느렸을 것이다.
신라시대를 기술한 <화랑세기-김대문>에서는 "어진 재상과 충신들이 화랑으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 역시 이로부터 나왔다"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단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준군사조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민족의 모든 나라들의 개국의 밑바탕에는 이 준군사조직의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즉, 이 준군사조직의 수장이 이 준군사조직의 힘을 바탕으로 나라를 열었던 것이다.
이 준군사조직은 일종의 사조직인데, 전두환이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바탕으로 제5공화국을 연 것이 나쁜 쪽이지만 일례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두환의 하나회와는 달리 이 준군사조직은 신교라는 종교가 바탕이 되고 신라화랑의 세속오계의 모태인 참전계 또는 구서오계의 윤리덕목을 갖춘 만인이 우러러보는 존재였다.
한마디로 충·효·신·용·인을 실천하는 단체인데 나라이든 백성이든 싫어할 이유가 없다.
고구리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조의선인(早衣仙人)>이라 했는데, 수·당과의 전쟁 당시 조의선인 20만으로 수백만의 대군을 무찌른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평상시에 명산대천을 오가며 심신을 연마하고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무장한 조의선인을 농사짓다가 전쟁터에 억지로 끌려온 오합지졸로 상대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진배없다.
이처럼 정규군보다도 훨씬 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조직이 평상시에 동원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들이 혁명을 일으키기엔 제격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라가 기울었다는 전제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폭군이 등장하면 예외이다.
이들이 혁명을 일으켜 임금을 교체한다.
고구리시대에도 여러 번 이런 일이 있었다.
명림답부가 그랬고, 연개소문이 그랬다.
특히 연개소문이 아홉살에 조의선인이 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들을 일컫는 말에 '선(仙)'이 들어간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또한, 평소에 이들이 명산대천에서 심신을 수련한다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단군세기-이암>에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단군이 오가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재위를 버리면서 산으로 들어가 선인(仙人)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를 <삼국유사-일연>에서는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이에 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라고 왜곡하고 있다.
선인과 산신은 천지차이이다.
사실 이런 왜곡은 매우 일반적이다.
고려시대까지도 유지가 되던 선인의 전통이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단절된 것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차이나가 도교의 신선사상으로 변질시킨 신선의 개념을 조선왕조가 역수입해서 선인을 신선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연개소문이 들으면 호통칠 일이다.
차이나 측 사서들과 이를 그대로 베낀 <삼국사-김부식>이 연개소문을 도교에 빠진 듯이 왜곡하고 있지만, 실상은 영류왕이 도가를 수입했고 연개소문이 이에 반발한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게 조의선인의 수장인 연개소문이 선인의 사상을 변질시킨 도교에 빠졌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것이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고성(27세 영류제)이 즉위하자 이전의 열제들이 남긴 법을 모두 버리고 당에 사신을 보내여 노자상을 구해 와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노자 도덕경 강론을 듣게 하셨다. 이때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그만두도록 청원하고 장성 쌓는 것을 중지하도록 간언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매우 언짢게 생각하여 연개소문의 군사를 빼앗고 장성쌓는 일을 감독하라 명하셨다. 그리고 비밀리에 여러 대인들과 함께 연개소문을 주살하려 의논하셨다. 이에 연개소문이 전해듣고 탄식하며 열병식을 연다는 핑계로 모든 대신들을 초대한 후 일시에 쳐죽였다. 임금은 도망가다가 송양에서 군사를 모집한다는 조칙을 내렸으나 한 사람도 모이지 않자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고 군사를 빼앗긴 연개소문이 열병식을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데 이 열병식은 당연히 조의선인의 열병식인 것이다.
그러니 대신들이 의심하지 않고 모여든 것이다.
충·효·신·용·인의 조의선인이 백주대낮에 대신들을 주살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조의선인이 혁명에 동참할 정도로 신임하는 연개소문인데 도교에 빠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이나 사서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이렇듯 또 드러난다.
다음 시간에는 '선(仙)'자와 더불어 또 주목해야 할 글자인 '랑(郞)'에 대해 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