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중 일제의 핵무기 개발 다큐를 보면서 <선랑 사상>을 떠올리다
1934년, 도호쿠 대학 교수 히코사카 다다요시의 "원자 물리학 이론"이 발표되었다. 히코사카는 원자력에 의해 포함된 거대한 에너지와 원자력 발전과 무기가 모두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했다. 1938년 12월,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스만은 나투르비센샤텐에게 그들이 우라늄에 중성자를 폭격한 후 바륨 원소를 발견했다고 보고하는 원고를 보냈고, 동시에 그들은 이 결과를 리스 마이트너에게 전달했다. 마이트너와 그녀의 조카 오토 로베르트 프리슈는 이 결과를 핵분열로 올바르게 해석했고 프리슈는 1939년 1월 13일 실험적으로 이것을 확인했다. 전 세계 물리학자들은 즉각 연쇄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의 정부에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통보했다.
일본 원자력 프로그램의 주역은 닐스 보어의 가까운 동료이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동시대 인물인 니시나 요시오였다.니시나는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공저했다. 니시나는 기초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1917년 도쿄에 설립된 RIKEN 연구소(물리 화학 연구소)에 1931년 고에너지 물리학을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핵 연구소를 설립했다.니시나는 1936년에 26인치(660mm) 사이클로트론을 처음 만들었고, 1937년에 220톤 사이클로트론을 60인치(1,500mm) 더 만들었다. 1938년에 일본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로부터 사이클로트론을 구입하기도 했다.
독일의 4개년 계획으로 인한 독일의 일본 동맹 때문에, 일본 정부와 군부는 이미 핵 기술에서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핵 과학을 추구해 왔다. 이것은 니시나가 양자역학을 일본에 도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39년 니시나는 핵분열의 군사적 잠재력을 인식했고, 미국인들이 일본에 대항하여 사용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1939년 8월, 헝가리 태생의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와 유진 위그너는 아인슈타인-실라르 편지의 초안을 작성하여 "새로운 유형의 매우 강력한 폭탄"의 개발 가능성을 경고했다. 미국은 미국에서 핵분열 무기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이것은 결국 거대한 맨해튼 프로젝트로 발전했고, 일본이 사이클로트론을 구입한 실험실은 무기 연구의 주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1940년 초여름, 니시나는 기차에서 야스다 다케오 중장을 만났다. 야스다는 당시 육군 항공부 기술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니시나는 야스다에게 핵무기 제조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일본의 핵개발 프로젝트는 1941년 4월 야스다가 핵무기의 가능성을 조사하라는 육군 장관 도조 히데키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때까지 공식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야스다는 이 명령을 RIKEN 연구소의 소장인 오코치 마사토시 자작에게 전달했고, 그는 1941년까지 100명 이상의 연구원을 보유한 원자력 연구소의 니시나에게 전달했다.
『일본에는 해군과 육군이라는 두 국가가 존재한다. 그 둘의 관계는 전쟁 중인 국가의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다큐멘터리에 나온, 당시 일본 해군의 전투기 제작을 도왔던 독일인 기술자의 수기
일본의 육해군은 군령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즉, 별개의 지휘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육해군은 각군의 기원(조슈 번의 기병대와 사쓰마 번의 수군)부터 육군사관학교와 해군병학교의 설립을 거치며 철저한 대립관계를 유지했다. 2차대전도 대본영육군명령과 대본영해군명령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다. 이 두 대본영은 2차대전을 각자 따로 지휘했다.
이에 따라 핵무기 개발도 통일적인 추진을 하지 않고 육군과 별도로 해군도 독자적인 개발을 하게 된다.
일본제국 해군 기술연구소는 핵무기에 대한 조언을 위해 도쿄 제국 대학의 교수들을 고용했다. 1941년 진주만 공격 전, 일본해군 기술연구소의 이토 요지 함장은 일본 해군이 핵분열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도쿄 제국대학의 사가네 교수와 상의한 후, 그의 연구는 핵분열이 해군의 잠재적인 동력원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1942년 7월부터 1943년 3월까지 10차례에 걸쳐 니시나가 의장을 맡은 핵물리학 응용연구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일본 해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한 후, 이토 대위는 1942년 6월 말까지 "B-리서치"("진 프로젝트"라고도 함)로 지정된 새로운 유형의 핵무기 개발을 제안했다. 1942년 12월, 프로젝트의 깊숙한 곳에서, 원자 폭탄이 원칙적으로 실현 가능하지만, "일본 과학자들은 심지어 미국조차도 전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원자력의 적용을 제때에 실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믿었다." 이로 인해 해군은 흥미를 잃고 대신 레이더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1942년 육군은 낙담하지 않았고, 위원회가 보고서를 발표한 후 곧 리켄에서 니고 프로젝트("두 번째 프로젝트")라는 실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것의 목적은 전자기 분리, 기체 확산, 원심 분리와 같은 다른 방법을 무시하고 열 확산에 의해 우라늄-235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1944년 봄까지, 니시나 프로젝트는 클루시우스 튜브를 통한 충분하지 않은 육불화 우라늄 때문에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구리 튜브 내에 이전에 제공된 우라늄은 부식되었고 프로젝트는 U-235 동위원소를 분리할 수 없었다.
1945년 2월, 소수의 과학자들이 RIKEN 복합체의 기초 분리막에서 소량의 물질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분리 프로젝트는 1945년 3월 USAF의 도쿄 대공습으로 인한 화재로 건물이 파괴되면서 끝이 났다. 우라늄 더미를 만들려는 시도는 없었고, 중수를 이용할 수 없었지만, 니시나의 분리기를 담당한 타케우치 마사는 우라늄 원석에서 우라늄-235 5%~10%까지 농축될 수 있다면 경수로 충분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이러한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후쿠시마현 이시가와 마을에서 우라늄 정련시설을 만들었고 한국, 중국, 버마에 이르는 지역에서 우라늄 광석을 찾았다. 일본은 또한 나치 독일등 동맹국들에게 우라늄을 요청했고, 560kg의 가공되지 않은 산화 우라늄이 1945년 3월말 독일 잠수함 U-234은 킬항을 출항해서 일본으로 향했지만, 독일의 항복 이후 대서양에서 미군에게 항복했다. 우라늄 산화물은 "U-235"로 표시되었는데, 이것은 잠수함의 이름을 잘못 표시했을 수 있고 정확한 특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그것이 무기급 물질이 아니며 항공연료에 사용될 합성 메탄올 생산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 공격은 또한 효과적으로 클루시우스 관과 일본이 전쟁에 유리하게 영향을 미치고 핵무기에서 서구와 경쟁할 수 있는 때에 원자폭탄을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파괴했다. 역사학자 윌리엄스에 따르면, "독일의 원자력 프로젝트를 방해했던 충분한 고품질 우라늄의 부족은 또한, 밝혀진 바와 같이, 폭탄을 만들려는 일본의 시도를 방해했다. "이것이 맨하탄 프로젝트 인텔리전스 그룹의 결론이었는데, 그는 또한 일본의 핵 물리학자들이 다른 나라의 핵 물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나다고 보고했다.
전후인 1945년 10월 16일 니시나는 생물학 및 의학 연구를 위해 리켄 연구소에서 2개의 사이클로트론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미국 점령군의 허가를 구했지만, 11월 10일 워싱턴에 있는 미국 전쟁 장관으로부터 교토 대학와 오사카 대학의 리켄에서 사이클로트론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리켄의 사이클로트론은 분해되어 도쿄만으로 던져졌다.
이 파괴에 대한 항의 편지에서 니시나는 리켄의 사이클로트론은 핵무기 생산과 무관하지만, 대형 사이클로트론은 공식적으로 Ni-Go 프로젝트의 일부였다고 썼다. 니시나는 사이클로트론이 단순히 장치 작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원자력 사용을 위한 기초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고 제안함으로써 프로젝트 내에 그것을 배치했다. 프로젝트의 군사적 특성은 그에게 자금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고 그의 연구원들이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막았다.
미국은 방대한 가용 자원을 활용하여 일본보다 유리한 환경에서 핵무기 개발에 나설 수 있었다.
이를테면 핵물질을 만드는 6가지 방법(①우라늄 235를 농축할 거냐, ②원자로를 가동해서 플루토늄을 생산해 분리할 것이냐, ③우라늄 235의 농축은 기체확산법을 이용할 것이냐 ④원심분리기를 이용할 것이냐, ⑤원자로를 가동한다면 중수를 감속재로 할 것이냐, ⑥흑연을 감속재로 할 것이냐)을 미국은 6가지 모두를 사용한 반면, 일본은 ③의 방법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당시엔 양자물리학은 진정 미지의 구역이었기 때문에 어느 방법이 성공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일본 모두 핵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46년 10월 2일, 애틀랜타 컨스티튜션 신문은 전쟁 후 한국에서 제24형사수사단의 조사관이었던 기자 데이비드 스넬이 1945년 8월 12일 함경남도 흥남 앞바다에서 일본의 원폭 실험이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실었다. 1945년 9월 흥남에서 방첩을 담당했던 와카바야시 대위의 가명을 건넨 일본 장교로부터 서울에서 자신의 정보를 전달받았다고 한다. 일본의 핵물리학에 대한 전시 관심에 대한 모든 정보에 대한 엄격한 검열을 책임지고 있는 SCAP 관계자들은 스넬의 보고서를 무시했다.
1947-48년 조사에서, 그러한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거나 알고 있어야 했던 일본 과학자들로부터 의견을 구했다. 많은 수의 일본 과학자들이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스넬의 이야기에 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로버트 K에 의해 스넬의 진술이 반복되었다. 윌콕스는 1985년 그의 책 일본의 비밀 전쟁: 일본의 시간과의 경쟁에서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이 책은 또한 윌콕스가 일본이 흥남에 원자력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 자료에서 나온 새로운 증거라고 말한 것을 포함했다. 에너지부 직원 Roger M의 이 책에 대한 리뷰에서 이러한 특정 보고서는 기각되었다. Military Affairs 저널에 게재된 Anders, 두 과학 역사가가 쓴 논문은 Isis, 그리고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저널에 또 다른 논문이다.
일본 내에 있는 핵시설은 2차대전 중 미군의 전략적 공습에 의해 모두 파괴된다.
이에 따라 일본 내 핵무기 개발은 중단되고 만다.
하지만, 모종의 기관에 의한(아마도 해군) 비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가 한반도에서 진행되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는 우라늄 농축을 위해 대량의 전기가 필요함을 들어 한반도 최대의 수력발전소가 있는 함경도에서 추진된 것으로 여겨진다. 앞서 흥남 앞바다에서 원폭 실험에 의한 어둠 속에서 매우 밝은 빛을 목격했다는 어부들의 기사와 관련된다. 이 한반도 내 핵시설은 미군의 첩보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아 공습을 피할 수 있었고 1945년 8월 12일의 원폭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12일 원폭 실험의 성공 여부와 별개로 이미 일정 수준에 이르른 일본 핵시설을 당시 원자폭탄 개발에 뛰어들어 미국 등에서 정보를 빼오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소련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이 접수한 이러한 일본 핵시설은 미국 등에서 빼내온 정보와 더불어 미국에 이어 소련이 세계 2번 째로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핵시설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면 말이다.)
<일본의 사무라이>가 <단군조선의 삼랑>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선랑 사상>은 전장에서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기술 개발 경쟁에서도 빛을 발한다.
2차대전 중 일본의 핵무기 개발 성공도 이러한 선랑 사상이 빛을 발한 결과인 것이다.
신라시대를 기술한 <화랑세기-김대문>에서는 "어진 재상과 충신들이 화랑으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 역시 이로부터 나왔다"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위 기사에서 <무武>에 집중하는데, <문文>을 간과하면 안된다.
"어진 재상과 충신"은 선랑 사상의 <문文>인 것이다.
단군조선 3세 가륵단군 때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그것이 가림토이다<단군세기>.
<한글-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의 업적에 세계가 놀라워 하지만, 사실은 삼랑 을보륵의 업적이다.
저러한 놀라운 글자를 만드는 과업이 <2차대전 중 핵무기를 만드는 업적>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최첨단 기술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선랑 사상인 것이다.
삼랑 을보륵은 가림토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삼륜구서>의 가르침을 이끈 동방철학의 대학자이다.
<삼륜구서>는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공자와 맹자의 유학>의 기원이다.
또한, 을보륵은 선인(仙人)이기도 한데, 태백산(太白山)의 사선각(四仙閣)에 모셔진 사선(四仙)의 한분인 것이다.
사선은 배달국시대의 발귀리(發貴理), 자부선인(紫府仙人), 단군조선시대의 대련(大連), 을보륵(乙普勒)이다.
이중 발귀리는 태호복희와 동문수학하면서 팔궤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는 동방문명의 대학자이다.
<팔궤>를 뚝딱 만든 업적도 <2차대전 중 핵무기를 만드는 업적>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자부선인은 <칠정운천도>를 만들어 <칠성력>을 제정할 수 있게 하고 <삼황내문경>을 지어 도교의 일대종사이기도 한 황제헌원을 가르친 대학자이다.
<칠성력>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일주일>의 기원이다.
즉, 수메르의 역법의 기원이 자부선인의 <칠성력>인 것이다.
이 업적이 <2차대전 중 핵무기를 만드는 업적>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련은 동생인 소련과 함께 삼년상을 최초로 시행하는 등 효사상으로 동방에 이름이 높다.)
한마디로 사선은 대단한 학자들이며 위인이다.
그런데 을보륵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삼랑이기도 한 것이다.
이들이 유소년 시절부터 선랑 사상으로 무장하여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것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1543년 포루투갈이 일본에 화승총을 전해준 이래로 <일본 사무라이>들은 동아시아 최강의 전력을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빼앗기지 않았다.
1644년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을 돌파한 <후금의 팔기군-선랑의 후예>은 차이나 역사상 최대 판도의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에 반해 고려시대까지 명맥을 이어오던 <선랑의 전통>을 잃어버린 <이성계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에 대마도 도주가 진상한 조총을 그냥 군기시(軍器寺)에 보관만 했다.(유성룡-징비록)
21세기인 지금, <선랑 사상>은 바로 <과학 기술>일 것이다.
현 정권의 연구개발비 예산 삭감과 의과대 정원 확대 정책으로 이공대에 재학하던 많은 우수한 학생들이 다시 대입을 준비하여 의대를 진학하고자 한다고 한다.(2024년 8월 현재)
이 시점에 <선랑 사상>을 잃어버린 <이성계 조선>이 연상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