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료 부친상 참석 등 몇 번에 걸친 장례식장 방문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내 나이 또래의 부모님들이 운명을 달리하는 소식을 접하며 우리 부모님의 나이도, 삶도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아직은 살아계심에, 건강하심에 감사를 드린다.
죽는 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도 그럴 것이며,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다.
원로 철학자 ‘강영안’ 교수가 쓴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인간이 아름다운 소멸을 말하다’ 라는 책에서는 삶과 죽음의 연속성, 본질적인 물음이 나온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질문은 소크라테스부터 이어진 생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했고 플라톤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죽음에 대한 수련이라고 했다.
수많은 철학자가 죽음을 생각하고 고민한 것은 아마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경험할 수 없으니 결국은 삶과 연결하여 생각하고 삶으로부터 죽음의 이유, 존재를 밝히려 했을 것이다.
죽지 못해 산다, 죽지 않기 위해 산다 등 흔히들 하는 죽음이란 이야기.
장례식장에 다녀오며 나는 죽음에 대해, 그리고 지금 내 삶에 대해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미래의 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봐야 겠다. 정해지지도 않았고, 어떻게 될 지도 모르지만 이 자연의 섭리를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그러기 위해서 결국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한다.
“우리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하다. 삶과 죽음, 깨어있음과 잠, 젊음과 늙음” - 헤라클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죽음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이 결국은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같은 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