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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Oct 21. 2023

같은 층 기숙사생한테 사과하고 일어난 일

홍콩유학일기_정말 미안했어요

교회 성품훈련을 받으면서 사과할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그녀가 생각났다. 거의 까먹고 있었는데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녀가 나만 보면 얼굴이 굳었다. 그것도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완전히 얼어버리는 거였다. 


상황은 이렇다. 그녀는 PG (post graduate)으로 UG (Under graduate) 일 때 이 기숙사에 살았다. 그때 냉장고 마지막칸은 공용이었다. 올해 내가 그녀와 같은 기숙사 층에 배정되었다. 내 냉장고 칸은 마지막 칸, 그녀 입장에서는 공용칸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몇 주 동안 모르는 사람 음식이 내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칸을 세 사람이서 쓰고 있기에 룸메한테 물어봤는데 모른다. 내 옆 방 사람 문 두드려서 미안한데 혹시 하고 물었더니 모른다. 셋 다 우리 중 한 명이겠거니 하고 말 안 하며 몇 주가 지나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났고 음식을 꺼내서 밖에 놔두었으며 하루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냉장고를 보니 똑같이 음식이 내 칸에 있길래 밖으로 꺼내두는 타이밍에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도 화가 났고 난 빠르게 "허락 안 받고 꺼내놓은 거 미안해. 근데..."로 본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녀도 받아주었지만 결국 본심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단체메세지 방에 사진 찍어서 올려줘. 허락 없이 하룻밤 동안 꺼내 놓지 말고." 라고 말했다. 


흥.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지나갔는데 그 생각이 확 나면서 '와씨.' 사과해야겠다 싶었다. 내가 가진 사과목록 중에서는 그녀가 가장 쉬워보였다. 그런데 안 쉬웠다. 화장실에서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너무 타이밍이 안 맞고 힘들었다.


오늘은 금요일로 교회 금요기도회를 다녀왔다. (쓰다보니 왜 양심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생각나는 잘못을 사과하라는지 알겠다. 너무 모순적인 자신 때문에 믿음이 흔들릴 것 같다. 인정인정...)


그리고 새로 온 신입생 두 명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왔다. 그 사이에 핸드폰 놓고 오고, 뭐 또 사과하고 아무튼. 집에 왔는데 아침마다 많이 본 인싸 로컬 학생이 "봐, 쟤는 쉽다니까." 이렇게 영어로 말하면서 내 옆 친구한테 손을 흔드는 걸 봤다. 그걸 보며 기분이 확 나빠져서 '뭐라는 거야?'이러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그런데 그녀를 만났다. 안 그래도 열이 살짝 올라와서 그 남자한테 톡 쏘아줄 생각과, 오늘 키를 놓고 와서 경비원 아저씨에게 키 빌린 값을 줘야 하는 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런 길에 팬트리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봐도 비디오. 그녀일 게 틀림없었다. 가서 잠깐 말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앉았다. 평소라면 말을 안 붙이거나 얼어버릴 그녀가 어색한 미소로 -그럼에도 눈부신 미소- "how are you doing?" 이라고 말을 꺼냈다. 나도 그걸 말할 생각이었어서 답은 안 하고 똑같이 "how are you doing?" 해버렸다. 그리고 사과를 했다.


진심이었다. 생각하고 곱씹어보니 내가 잘못했다. 


남의 물건에 손 대는 거 아니었는데. 그 뒤로 계속 혹시나 내가 그녀 물건을 함부로 만진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다. yours인데 내가 overnight 동안 밖에 둬서 미안해. 진심이었다. 


그리고 뜻밖으로 그녀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알게 된 게 정말로 그녀는 UG일 때 내 칸이 공용이었다. 또 지난 3개월 동안 정말 힘들었다고.


흥. 뻥치시네. 이렇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호기심은 솟구치고 점점 대화는 사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master(대학원 과정)를 3개를 동시에 할 생각을 한다고?"

"TED 강의자한테 이메일을 보내서 PhD를 하고 싶다고 했다고?"

"Psyc (심리학) 전공인데 law firm에 들어갔다고? 제품 디자인을 했다고? finance 회사에 들어갔다고?"

"start-up을 만들었다고? 지금도 만들 생각이라고?"


그녀가 Ngo에 일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오늘 퇴사했다는 건 몰랐지만. 


ngo가 정말 빡셌고 살도 많이 쪘고 professionally, personally 많이 망가진 것 같다며 그녀가 말했다. 힘들어 보였다. 많이 안 웃고 포커페이스해서 미안하다고 그랬다. 


그건 정말 미안할 게 아닌데. 


"아니. psyc 전공 아니었어? double major야?"


물어봤더니 minor가 두 개라고 한다. 그리고 일단 재능이 넘치고 일을 많이 하는 성격인 것 같다. 예쁘기도 엄청 예뻐서 사실 딱 핫걸 (...지금 너무 그녀를 좋아하는 티를 많이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누가봐도 "아. 저 여자 정말 멋있다." 싶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재능 넘치고 열심히 하는 머리와 열정까지 가졌으니. 


난 직감했다. 아 이 사람 이제 못 볼 것 같아. 대학 뒤에는 이제 못 볼 것 같아. 내가 대학시절에 이 사람이랑 이야기를 했다는 게 언젠가 무용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전화번호를 받아놓아야지 생각했다. 


사실 난 ngo에서 일하는 것도 꿈인데 그녀는 이미 일하고 있다. UN에서 일하는 건 진짜 하늘의 별인 내 꿈의 직장인데 그녀는 그것도 살짝 경험이 있다. 비즈니스는 정말 생각도 못 해본 쪽인데 그녀는 하고 있다. 


"투자자들을 만난다고? 어떻게 알았는데?"


사실 그녀가 말하는 영어단어들 중에 crypt, pitch deck 등등 이런 전문용어 (맞겠지?) 들은 대충 알아들은 척 했다. 그러다가 '아. 나 이거 써먹겠다.' 싶어서 꼬치꼬치 물어보기도 하고 대충 알아들은 척 멋있는 척 하기도 했다. 그런데 psyc 전공이 전공과 영 상관없는 일을 하기에 멋있는 척은 다 엎고 물어봤다. 


알고보니 그녀는 gym에 자주 가는데 (여기까지 오케이 그래, 핫걸은 운동을 하는구나. 짐에서 인맥 만든다는 게 영 뻥은 아니었어.)

modeling도 했었다고. (응? 모델링? 건축하나? 아니면 모듈을 잘못 말한 건가?)


일단 gym부터 이런 일상적인 단어가 나온 게 믿기지 않아 물었다. 


"짐? 짐? g. y. m? exercising?"


그리고 모델링은


"modeling? pose? posing?"


아무튼 그래서 모델일을 하면서 사진을 찍다보면 (쇼핑몰) 볼파티가 있다고 한다. (파티)

그러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랑 밍글링하면서 비즈니스맨 혹은 등등을 만난다. 그러다가 이제 어떻게 넘어간 문맥인지 모르겠는데 그녀가 finance일을 하게 되었을 때 (되게 유명한 금융 회사인데 이름 까먹었다)-심지어 그쪽에서 marketing을 할 때-투자자들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 회사가 매일밤 networking event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투자자들을 만나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를 정부 대회에 넣었는데 챔피언을 받고. 일본에서 cool한 인턴십에 들어가서 그걸 택하고.


등등등.


솔직히 이걸 읽고 있는 당신, 생각해보라.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껌벅 넘어갔을까? 안 넘어갔을까?

나는 엄청난 사람이긴 하지만 비즈니스 쪽은 문외한이다. 정말 하나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앱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udemy에서 flutter 강의를 사서 flutter를 배우려고 지난 방학에 노력했는데 지금 cocoapod이 계속 에러를 내서 flutter를 열지도 못했다. 


하하!


그녀도 앱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빛나는 아이디어가 있었고 그걸 pitch deck을 만들어서 정부 대회에 보냈고 챔피언을 받았다. 그 외에도 하다보니 co-founder가 되고 회사를 차리고 차렸다가 엎었다가 하면서 오늘이 되었다. 


그렇게 21살짜리 한국인 여자애를 만나서 이야기를 여기까지 꺼내놓게 된 거다. 

지금도 새 아이디어가 있다며 내게 말했고 intern 제안도 했고 아이디어 남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그럼 내 아이디어를 훔치는 거니까." 라고 살짝 진지하게 말했다. 난 약속했다. "절대." 안 말할게.


"start-up에 어떤 passion이 있어?"


(영어 섞어써서 죄송합니다. 새벽 두시라 머리속에서 한 번 더 번역하기 너무 힘들어요.)


설마 돈 때문에 한다고 하지는 않겠지. 이런 마음을 깊숙이 두고 최대한 철학적인 단어들로 바꿔서 물어봤다. passion. 얼마나 예쁜 단어인가. 


그녀는 날 빤히 보더니 자신이 보여줬던 무슨 두바이에서 열리는 networking event 웹사이트에 가장 밑에 있는 관련 기업 로고들 빽빽한 부분을 손으로 하나씩 집었다. 


"나 이 사람 알아."

"이 사람도 알아."

"여긴 파산했어."

"여기는 young company야. ceo도 어려."

"google에도 아는 사람들 있어."


그리고 날 쳐다보고 말했다. 그 확신에 찬 눈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생각보다 어린 사람들이 먼저 앞서나가고 있어."


그녀가 말했다. 


"I want to make an impact"

"내가 능력이 부족할지는 몰라도 어리잖아. 안 되면 다시 하면 되지."

"정 안 되면 clinical psychologist나 MBA (맞나? 모르겠다)공부해서 finance 다시 들어가지 뭐."


그리고 왜 corp (회사)에 들어가기 싫은지 말해줬다. 


"they don't work."

그녀의 말에 내가 웃어버렸다. 


"that's so simple but so strong."

진짜 그녀가 말한 것 중에 제일 간단하고 제일 센 말이었다. 


시니어들이 일 안 하고 자신에게 일을 넘긴다는 말을 들으면서 "으흠."하고 위아래로 그녀를 쳐다봤다. 


안 되면 clinical psychologist 하지? 장난해?

난 그거 거의 못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데? 너무 competitive해서?


들어보니 그녀의 삼촌이 neurology clinic을 운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잘 사는 집안 딸이라고 치부하기에 그녀는 정말 hard working it girl 인 걸. 


"psyc 전공으로 일 하려면 정말 limitation 확실히 있어."


그녀가 말한 말이다.


"홍콩에서는 clinical psychologist 못 해."


나를 보며 한 말이다. 그래그래. 맞아요. 못하지 난 광둥어를 못하니까. 


말이 거의 끝나고나서 우리는 자정이라 완전히 풀려있었다. 그렇게 이 사과가 이런 엄청난 사람을 만나게 해줄 줄 몰랐다. 엘레베이터를 타려고 나오면서 음소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엘레베이터 안에서 주저 앉아 문에 비친 날 보며 음소거로 소리를 질렀다. 


주님. 이 정도로 부어주실 줄은 몰랐잖아요. 어떡해요. 


순간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평범하게 살길 원치 않으신다."라는 성품훈련 도중 들은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요!'

아닌가? 아니지. '이 정도'라는 건 없지.


start-up이라 나도 한 아이디어하는데. 아이디어로 나 장난아니지. 

(이걸 왜 아나면 지금 하고 있는 인턴십을 하며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대회가 이렇게 아이디어 PT (발표)해서 상금 따는 거구나. 그렇게 수긍했다. 안 그래도 교회에서 사업으로 대회 우승한 오빠가 있는데 그때는 "아항. 그런 걸 했구나. 아항."이러고 정말 귀 뒤로 넘겼다. 


5번 정도 사업을 했다가 말아먹고 5번째에 잘 되었다는 그 오빠 얘기는 그냥 "저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넘겼는데. 


엘레베이터를 올라가라고 다시 기다리며 순간 또 뭔가 스쳐지나갔다. 사업? 스타트업이 사업이지? 

사업 하는 거 아니라고 배운 것 같기도 한데. 


싸아.


'흠. 그래도 신기한 사람이였어.'


주님은 날 어디로 인도하실까. 기대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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