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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구슬 Sep 25. 2023

서론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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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결코 수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1학년, 그니까 긴 인생의 첫 갈림길을 선택하는 시기에 일찍이 미대라는 전공을 지망했으면서도 대학 4년의 커리큘럼까지 모두 완수한 이제서야 이 길의 흐름을 헤아려보기 시작하며 깨달은 하나의 교훈이다. 배움은 배우는 자의 의지가 반영되어 발생하는 결과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배움의 의지는 어디서 발생했는가. 약 3주 전, 활동하고 있는 가구디자인 커뮤니티의 회식에서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흑구슬님이 디자인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전공을 선택한 후 6년 간 디자인사 한 번을 훑지 않은 자의 최후였다. 물론 디자인과는 디자인사를 가르치는 곳은 아니므로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단순히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 핀터레스트와 비핸스만 깔짝거리며 작업물을 배출하는 사람과 희대의 디자이너들에 대해 알아보고 그 디자이너들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어떤 과정을 통해 작업물을 만들었는지 알아본 다음에 그 자세를 작업물에 녹여내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배우려는 의지없이 눈 앞의 과제를 쳐내기 바빴던 지난 날의 나는 그런 건 대의를 가진 엄청난 디자이너가 되려는 사람들이 손대는 영역이라 생각해왔기에 작업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레퍼런스 서치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디자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디자이너 레플리카에게도 취향과 미감이 존재한다. 안도타다오의 건축물을 보고 감탄하고, 애플의 신제품 설명회를 보며 알값이 어쩌구 사용성이 어쩌구 나름의 감상도 남길 줄 안다. 그러나 취향은 누구나 가지며 미감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타고난 재능이 많지 않았던 필자는 작년부터 가구디자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우물 밖으로 나섰다가 한계에 부딪혔다. 타당한 근거를 가지는 조형은 어떤 것이지? 제품의 사용성이 좋으려면 제품이 수행하는 역할의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해야하지? 단순 레퍼런스의 카피가 아닌 오리지널리티를 가지는 디자인을 하려니 명확한 기준을 잃은 사고들이 머릿 속에서 방황했다. 그러던 찰나 디자인을 향한 진정성까지 의심받으니 디자인에 대한 깊이있는 배움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 말은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회식 후 짧은 시간이지만 약 2~3주 간 디자인에 대한 스터디를 개인적으로 진행해봤다. 처음에는 가구 디자인부터 스터디하기 시작했다. 접근을 어떻게 해야하나 막막했으나 주워들은 건 있으니 이노메싸에 들어가 가장 최근 포스트에 올라와있는 제품을 서치하기도 했고, 아르텍이나 헴, 루이스폴센 등 유명한 리빙 브랜드의 철학, 제품 제작 과정이나 컨셉을 보기도 했다(아예 초심자와 달랐던 점은 가구를 제작하는 활동을 한 경험이 있으니 제작자의 입장에서 제품을 분석하게 되어 필요한 정보가 더 잘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또 어느 날은 건축가들이 디자인 한 가구들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디자인 안에 디자이너의 삶이 녹아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뒤로는 디자이너 자체에 대해서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디자이너들을 분석한 결과 그들이 공통적으로 취하는 자세들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성공한 디자이너들의 공통점이니 나름대로 따라해보기 위해 정리해보았다.


첫 번째는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산업혁명이 일어나며 단순히 나무를 자르고 깎아 만들어지던 가구의 고정관념이 깨지고 다양한 산업자재로 만들어진 타임리스한 가구들이 탄생했다. 시리즈 체어는 밴딩된 합판들이 겹쳐져 만들어졌고, 바실리 체어는 쇠파이프를 밴딩하여 만들어졌다. 그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을 방식들이 이제는 당연한 제작 방식이 되었다. 언제 또 새로운 제작방식이 보편적인 프로세스가 될지 모르는 일이니 제작방식의 한계로 형태에 제한을 두지 말 것.


두 번째는 자신의 명확한 기준을 항상 디자인에 반영할 것.

장 푸르베는 당시 모더니즘 스타일의 의자들이 쇠파이프를 사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유행임에도 불구하고 스탠다드 체어를 디자인할 때 가장 편하고 아름다운 방식은 철판을 절곡하고 겹쳐서 만드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여 그 제작방식을 고집했다. 디터람스 역시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제품이 쏟아져나오던 시기에 최소한의 요소로 더 나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옳다고 여기며 미니멀리즘의 대가가 되었다. 물론 이런 명확한 기준은 그냥 개인적인 고집이면 안된다고도 생각한다. 많은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타당성이 뒷받침 되어야 고집이 옳은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이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할 것.

최초 일체형 의자로 유명한 베르너 팬톤의 팬톤체어는 당시의 기술로 제작하기 어려워 11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11년동안 그 디자인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절대 굽히지 않은 결과 그런 수작이 탄생한 것이라 생각한다. 무인양품의 디자이너 하라켄야 또한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에서 본질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통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조금 헛발질 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결국에는 영역이 넓어져있을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자세라고 했다. 꾸준히 무언가를 고민하고 갈망하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sns에서 봤던 글이 생각난다. 어떤 분야에서 한 자리를 꿰찬 사람들의 비결은 뛰어나서가 아니라 '존버'를 했기 때문이라고. 천재도, 평범한 노력형 인간도 누구나 포기를 고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을 잘 버티느냐에 따라 길의 방향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디자인이 사용되는 순간을 머릿 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볼 것.

공부를 하며 느낀 것인데 , 모든 좋은 디자이너는 제품을 디자인할 때 단순히 그 제품만을 머릿 속에 띄워놓지 않고 이 제품이 어떤 환경에서 사용되며 사용자가 제품을 사용을 할 땐 어떤 자세로 어떤 기분을 느낄지를 상상한다. 이 방식은 디자이너가 개인적인 사고와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고 당장 형태의 디테일을 어떻게 잡아야하나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또 붕 뜬 얘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당연하다. 나도 분명 한 달 전까지는 그렇게 느꼈으니까. 그런데 이 뻔한 말들을 디자이너들의 스토리와 스케치, 작업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니 처음 알게된 소중한 진리처럼 느껴졌다(실제로 깨달은 점들을 작업할 때 적용해보니 몇 달째 막혀있던 작업물에 새로운 해결안이 떠올랐기에 너무너무 신기했다). 일단 이 포괄적인 얘기들이 결코 디자인 프로세스와 동떨어진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필자 스스로 잊지 않길 바란다. 디자인의 초입에서 이 내용들을 고려하며 디자인의 방향을 잡아나간다면 디테일을 어떻게 잡아야하는지까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도 있다. 당분간은 이 내용들을 작업의 가이드처럼 여기며 나의 길을 더듬어나가려 한다. 누군가는 이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고, 그 외에도 더 옳은 방법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랬을 때 나는 그 말에 대한 충분한 숙고를 거친 후 맞다고 느껴진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이 가이드가 수정된다는 것은 내 시야가 확장된다는 반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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