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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Mar 20. 2023

낙숫물 한 방울

다시, 글을 쓸 결심


브런치북 <제주에서,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를 훑어보고 오시면 아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16년 전, 방송 작가가 되자마자 장만한 노트북은 얼마 못 가 몇몇 키캡에 구멍이 뚫렸었다. 집중해서 원고를 쓸 때 손톱을 세우는 습관 때문이겠으나, 덕분에 낙숫물이 댓돌 뚫는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필기의 타자기는 손님들과 내가 함께 뚫는 댓돌이다. 지난 6년 동안 내 방과 필기에 머물다 간 타자기들이 그러했듯, 작년에 새로 들여온 타자기의 자판에도 벌써 수많은 낙숫물이 떨어졌다.


떨어지는 방울방울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활자의 형태를 빌어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들이 쓰고자 했던 글의 무게, 그 예리하고 섬세한 감성은 타자기가 제일 잘 알겠지만, 이렇게나마 엿볼 수 있어 감사하다. 애써 만들어내기엔 부자연스러운, ‘세월이 필요한 흔적들’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요즘이라 더더욱.


2022년의 마지막 날 찍은 작업실 모습

작업실을 찬찬히 둘러보면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미 얻었고, 쌓아 올렸고, 그려가고 있음을 느낀다. ‘나와 필기에 머물렀던 손님들의 글을 모아 책을 만들겠다.’는 게 필기를 열기 전부터 구상한 오랜 목표였는데, 이제는 가능할 듯도 싶다.


오래 묵혀둔 평평한 댓돌에, 낙숫물 한 방울. 툭.




음.


사실은 최근 몇 년간 기록을 꾸준히 해두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 중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덤덤하게 말하고 쓸 수 있지만, 그간 나에게 몰아쳤던 다양한 문제들(이라는 여섯 글자로 눙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사건들. 예를 들어 엄마와의 갈등과 절연, 아빠 회사 동업자 일가족의 횡령과 5년에 걸친 소송, 필기 오픈과 코로나19, 양극성 장애와 성인 ADHD판정 등 각각 단행본을 써도 부족함이 없는 일들과 그 밖의 단발성 사건들)이 살아갈 의지를 갉아먹은 덕분에 글쓰기뿐만 아니라 하고 싶었거나 해야만 했던 많은 일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그러니, 쓰지 못했다는 사실에 어울리는 건 ‘후회’보단 ‘아쉬움’이 적확한 단어라고 나 자신을 잠시 다독여 본다. (이 문장에서도 쓰지 못했다와 쓰지 않았다의 사이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원고 청탁이 들어오거나 작가로서의 죄책감이 발동할 때, 드문드문 제주살이와 작업실에 관한 글을 쓰긴 했지만, 앞서 말한 자극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최선을 다해 괜찮은 척, 있어 보이게 끔 쓴 말쑥한 글들이라 다소 싱겁다. 당시 내가 겪고 있던 가장 큰 고통을 들어낸, 구멍 난 아름다운 그물 같은 글들. 그래도 그런 글이라도 쓸 수 있었던 것은 풍진 세월 속, 껍데기만 남아 바닥을 기던 나에게 꾸역꾸역 삶의 이유를 불어넣어 준 ‘필기’라는 작은 작업실과 이곳을 찾아준 사람들 덕분이다.


필기는 내게 있어 평생에 두 번은 못 이룰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낭만이자 냉엄한 삶터다. 나의 낭만을 사랑해 준 사람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들 덕분에 차가운 삶터의 온도가 몇 도쯤 올라갔는지. 그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정리해 봐야겠다.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는 이 상황이 좀 우습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그땐 분명 ‘아쉬움’이 아니라 ‘후회’가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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