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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Dec 09. 2017

왓 더 뻑?

<스위스 아미 맨> 비평

*영화 <스위스 아미 맨>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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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Hull and Robert McDowell - Montage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이다.

'왓 더 뻑?'

정말이다.


이분은 <해리포터>로도 유명한 다니엘 래드클리프 님이시다. 이 영화에서 시체를 담당하고 있다.


<스위스 아미 맨>은 뮤직비디오 감독이기도 한 다니엘  콴과 다니엘 샤이너트 감독의 첫 장편 영화이다. 스위스 아미 나이프, 즉 다목적 칼이라는 이름과 사람을 합쳐서 '스위스 아미 맨'이라는 제목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종의 맥가이버 인간인 셈이다.) <옥자>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 나왔던 폴 다노와, <해리포터>의 주인공을 연기했던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의 내용을 거칠게 말하자면, 97분 동안 시체가 방구를 뀌는 내용이다. 그만큼 황당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서사는 몰입도 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마력 또한 가지고 있다.


행크는 시체의 표정을 창조해내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폭풍에 배가 휩쓸려, 조그만 섬에 행크 톰슨이 표류하게 된다. (무인도에서 배구공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존하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을 맡았던 톰 행크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 같다.) 그러나 고립감, 외로움에 지쳐 행크는 자살을 시도하게 되고, 우연히 파도에 휩쓸려 온 어느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시체는 부패 중인 모양인지 자꾸만 방구를 뀐다. 그런데 방구가 예사롭지 않다. 마치 모터보트처럼 바다로 나아가는 힘을 가진 것이다. 행크는 그 시체를 타고 섬을 탈출한다. 추하다고 여겨지던 방구가 그토록 빛나게 느껴질 수 없다.



행크는 시체를 버리고 떠나려 하지만, 시체는 행크가 생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어준다. 우연히 시체를 관통하는 바람소리를 말소리로 착각한 행크는 시체와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한다. 시체를 주체로 대함으로써 시체는 깨어난다.


시체는 사실 관계의 주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죽어버린 몸뚱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시체는 논외이다. 그러나 행크는 그런 시체를 주체적으로 대하며 관계를 시도한다. 그리하여 인간이지만 비 인간인 시체가, 사회에서 소외된 어느 남자에 의해 깨어나게 된 것이다.


행크는 시체를 매니라고 부른다. 행크는 시체로서 태어난 매니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 준다. 죽음이 무엇인지, 똥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등등.. 매니는 행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돌아가는 여정에 있다고 이해한다. 행크는 매니가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캐내기 위해 그 여정을 인정하며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주고,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게 된다. 그리고 매니는 점점 자신을 활용하여 행크에게 다방면의 도움을 준다.


그러다가 매니와 행크는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매니는 끊임없이 자신과 행크 사이의 알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느낀다. 사실 행크는 매니를 속였다. 행크가 사랑하는 그녀가, 매니가 사랑하는 그녀라고 속였다. 거짓말을 깨닫고 매니는 제기능을 못한다. 자기 존재를 모르는 사람을 사랑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이윽고 매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텅 빈 껍데기를 깨워준 행크를 원망한다.


매니는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는 행크 때문에 외로워한다. 행크가 사랑하는 여성의 사진이 관 속에서 덮이는 장면은, 행크 자신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속이고 있음을, 자신의 사랑을 타인에게 속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의 행동과 생각, 감정을 끊임없이 드러내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행크는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는 것일 수도 있다. 죽겠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행크에게 매니가 말한다.


우리가 죽는다. 그것도 생각이지.


행크는 인정한다. 모든 게 자신의 상상 속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행크와 매니의 사랑은 결국 매니를 점점 살아있는 사람처럼 만들었다. 클라이맥스에서 매니가 힘겹게 기어가 행크를 구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벅차오르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게 행크는 매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점점 더 매니에게 솔직해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행크는 구원받는다. 한편으로 영화는 행크와 매니 사이의 연결고리를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연출을 보인다. 매니는 행크의 무의식인 셈이다.



나는 이 영화가 현실 세계에서 주인공의 사랑을 받고 주인공의 무의식을 체화하며 살아나게 된 어느 시체에 관한 우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매니가 실존하는지, 행크의 상상인지, 혹은 모호함 그 자체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나는 여기에서 매니가 행크의 무의식을 상징하는 실제의 존재라고 바라보며 영화를 해체해 볼 생각이다.




매니가 처음 깨어났을 때엔, 그는 과거의 인간이 아닌 시체 그 자체로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들, 행크가 말하는 단어들이 낯설다. 행크는 이를 설명한다. 매니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행크가 이해한 세계, 즉 행크의 세계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매니는 규칙, 규율 등의 사회적 형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원초적 본능과 완전한 솔직함으로 체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행크와의 관계 속에서 행크가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매니는 행크의 무의식을 드러내게 되고, 행크가 매니를 사랑하느냐의 관건은 행크가 매니 앞에서 솔직하냐가 된다. 행크가 매니에게 솔직해지지 못할 때 매니는 자기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매니가 다시 시체로 돌아가는 장면은 행크와 함께 사회에 나왔을 때 나타난다. 행크가 말했던 그녀를 직접 대면하자 매니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행크와 함께 버스를 만들어서 그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시뮬레이션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그 시뮬레이션 속 여성은 행크의 판타지 속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다. 즉 행크 중심적인 세계의 여성이기 때문에 그는 버스에서 여성에게 말을 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기심은 실제 주체로서의 여성 앞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에게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지만, 이제 자기에게 솔직해지자 사회에서 부대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행크는 자기에게 솔직해지기로 결심한다. 모두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와중에도 그는 당당히 방구를 뀌고 시체를 껴안는다. 익명의 몸뚱이로 전락할 위기에서 매니를, 자신의 무의식을 구원해내고자 한다. 수갑을 차고 돌아가는 순간 방구를 뀌며 바다로 떠나는 매니는, 행크의 무의식의 숭고한 발현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웃으며 그 황당한 장면을 쳐다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놀라기도 하며, 누군가는 어이없어한다. 매니는 자기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함으로써 행크의 진솔함을 입증시켜준다. 하지만 매니는 망망대해를 향해 멀어진다. 자기 자신에 솔직해야 한다는 가치를 건네지만, 결국 그는 사회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아무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쉽게 방구를 뀌지 않는다. 고약한 냄새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성기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성기(성범죄)에 관한 상처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몰래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범죄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기 위해 자신의 본능, 원초적 행동들을 감추는 것이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영화가 건네는 가치는 중요하다. 영화에서 매니가 던지는 말들은 분명 위로가 되기도 하고, 되새겨볼 만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말들이 어떤 맥락들에서 나오는지도 봐야만 한다. 영화 초반을 이끌고 가는 유머 코드는, 당사자는 섬뜩해할 만한 이기적인 '사랑'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성적으로 희화화 되는 장면은 분명히 몇몇 관객들을 불편하게 할만하다. 그것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상처, 범죄가 될 수 있는 서사를 끊임없이 희화화하고 숭고한 것으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성별을 막론하고 시체와 살면서 사랑을 나누고 함께 방구를 뀌며 삶을 구축하는 건 이 영화만이 가진 가치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자기중심적 사랑, 즉 타인을 주체로 보지 않으며 자신의 판타지로 인해 구축되는 범죄적 사랑이 엮이면서 영화는 '아무 말 대잔치'로 전락해버릴 여지가 다분해진다. 차라리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함에서 나아가 사회에서 그것이 어떻게 부딪힐 수 있는지를 더 고민해서 보여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책임한 영화이다. 장난으로 시작해 살을 붙이다가 발견된 모순들을 지나친 느낌이 강하다. 분명 영화가 보여주는 독창성, 주제는 몰입감 있게 전달되지만, 영화의 서사를 곱씹을수록 결국 다음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어쩌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시체가 떠나는 장면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들은 관객의 반응을 암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경이롭게 쳐다볼 수도, 웃으며 쳐다볼 수도, 어이없어할 수도 있다. 감독은 이 관객들의 반응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영화에 대한 내 반응은 다음과 같다.


왓 더 뻑?


내가 뱉은 이 말은 중의적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추한' 것들의 독창적 이미지에 대한 경탄이기도 하면서, '아무 말 대잔치'라고 불릴 수 있는 몇몇 서사들을 '추한' 것들에 포함시켜 숭고함으로 포장시키는 것에 대한 황당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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