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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Feb 25. 2018

물에 흠뻑 젖은 사랑에 관한 시

<셰이프 오브 워터> 비평

Alexandre Desplat - The Shape Of Water


독창적인 판타지를 구현해내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새로운 판타지 멜로 영화를 선보였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념이 충돌하는 냉전시대에서 벌어지는 인어와 인간 사이의 사랑을 다룬다. 영화에서 보이는 이념갈등 서사는 인어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연대와 투쟁 서사에 의해 점점 축소된다. 이는 마치 비장애 백인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사소한 것'으로 내몰려왔던 장애인, 여성, 흑인, 성소수자의 서사를 복구시키는 것 같다. 영화는 서사의 전복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전복 또한 구현해낸다. 그리고 영화를 관통하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물'과 연결 지으면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델 토로 감독 특유의 동화적인 감성을 흠뻑 담아내고 있다.





'영상'과 '현실', 그리고 '밀실'


영화의 공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영상'의 세계, '현실'의 세계, 그리고 '밀실'의 세계다.


영상은 tv, 극장 스크린을 통해 나타난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그럴듯한 허구다. 감독이 관객의 유희를 위해 구성한 오락이다. tv 역시 재미있는 오락쇼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tv는 뉴스를 통해 현실적 세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전달을 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진실을 담은 뉴스보다는 포장된 오락쇼를 좋아할 것이다. 흑인 탄압에 관한 뉴스가 나오자 자일스가 채널을 바꾼 것처럼 말이다.


현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발 딛고 서있는 삶의 공간이다.

현실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기본적 욕구를 위해 생활한다. 때로는 성적 욕구를 채우기도 한다.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식당, 극장을 찾아가거나 생존을 위해 일터에 가면서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각자는 주어진 역할에 복무해야 하며, 자신이 위치한 계급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여성 청소부들의 수다나 의견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며, 흑인 손님은 직원이 내쫓을 수 있는 하등한 존재가 된다. 또한 게이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드러내는 순간 흑인과 같은 지위에 서게 되거나, (영화에서 명확히 표현된 건 아니었지만) 직장에서 부당한 해고를 당할 수도 있다.


항공우주연구센터의 비밀 연구소는 밀실이다. 밀실은 은밀하다. 거기에서는 과학적 진보를 위한 각종 연구와 실험이 전개된다. 이러한 밀실에 등장한 괴생명체는 존엄한 주체가 아닌 과학적 진보, 이념전쟁의 승리를 위한 대상이 된다. 괴생명체는 과학적으로 정의된 인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근대 과학이 가진 맹점을 보게 된다.


인류의 유전학적 개량이라는 믿음을 가진 우생학은 세계대전에서 나치에 의한 민족말살을 통해 그 반인륜성을 보여준다.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우생학적 사고는 오랫동안 영향을 끼쳐왔다.

1940년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불임수술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 불임 시술 대상자는 '자손을 기르기에 부적합한 자들'로 명시되었고, 이 범주에는 알코올 중독자, 간질병자, 시, 청각 혹은 다른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 범죄자, 정신박약자,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사람, 강간 피해 아동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그 대상이 젊은 흑인 여성들로 집중되었다고 한다. 불임시술 여부는 우생학위원회에서 빠르게 결정되었으며, 결정 기준 중 하나로 IQ 테스트가 있었다고 한다. 교육환경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IQ 테스트라는 기준은 부당한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에 일조했다.

또 여성과 남성에 관한 진화심리학 성고정관념을 재생산해왔다. '남성은 이런 존재다.', '여성은 이런 존재다.'라는 과학적 명제는 학계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버젓이 대중서적으로 출간되어 왔다. 그러나 온전한 '남성성', '여성성'으로 구성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각자는 그것들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사실상 남성과 여성이라는 명확한 이분법은 가부장제에 의해 거칠게 규정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미국 페이스북은 이것을 인정했는지 회원가입 페이지의 성별 선택란에 다양한 선택지를 마련해놓았다.) 또 1973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정신질환으로 명시되었었다.


이렇듯 밀실 내의 과학과 우생학은 현실의 비장애 백인 남성 중심주의를 공고히 하고, 버젓이 일어나는 각종 차별행위들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를 반영한 tv쇼, 영화는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들로 포장되어 사람들을 현혹한다. 현실의 부조리는 쉽게 오락에 의해 묻히게 되며,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향한 비판적 사고를 약화시킨다. 영화 초반부에서 아래층 극장의 소음과 빛은 엘라이자와 자일스의 공간을 침범한다. 현실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과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미디어에 의해 지배당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현실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내의 소수자들은 주체적이며, 나름대로 부조리에 대항한다. 엘라이자가 자신의 집에 인어를 데려와서 화장실을 물로 가득 채워 넣을 때, 엘라이자의 공간에서 물은 조금씩 조금씩 극장으로 침범하게 된다.





사랑의 정의


밀실에 의해 비장애 백인 남성 중심주의는 과학에 의해 표준으로 인식된다. 여기에서 괴생물체는 비인간으로 규정되고, 소련과의 우주경쟁에 의한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엘라이자는 그 괴생물체를 규정하는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정상' 이데올로기라는 시선 말이다. 그들의 소통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호프 스테들러 박사는 과학만능주의와 이념갈등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그는 조국 러시아를 위해 복무하는 과학자이지만, 그 이전에 과학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앎에 대한 사랑.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학'의 어원과도 같다. (철학 - philosophy = philia와 sophia, 즉 사랑과 지혜의 합성어) 지혜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지혜가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사랑이 철학자, 과학자를 비롯한 학자들의 기본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박사는 그의 역학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엘라이자의 작전을 돕게 된다.


엘라이자는 능동적이다. 정숙해야 할 여성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줄 아는 여성이며, 비장애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수화로 모욕을 줄 줄 아는 장애인이다. 그녀는 생물체를 만나게 되면서 그를 느끼고 공감한다.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어떻게 느낄 지에 집중한다. 그렇게 그녀는 생물체가 실험실을 탈출할 수 있도록 대범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가 타인을 '타인 그 자체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리처드 스트릭랜드는 목표를 위해 어떻게든 달성해야 하는 자기계발적 인간이다. 주어진 체계에 순응하며, 체계가 구분 지어놓은 계급에 맞추어 타인을 판단한다. 따라서 그는 정상적 이데올로기를 위협하는 인어를 동등하게 볼 수 없다. 그에게 인어는 정상적 사회를 위협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괴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시선은 '하등 하다.'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시선과 다를 바 없다.

아내와 성관계를 할 때, 그는 말하는 아내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 여성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가 멸시하는 엘라이자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엘라이자 앞에서 자신의 성적 욕구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페티시즘은 주체성을 상실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욕망인 것이다.



엘라이자가 보여주는 사랑은 세계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 앞에 자기 자신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자신과 관계 맺는 무수한 차이를 받아들인다. 물의 성질은 이러한 면에서 사랑과 닮아있다. 그것에 형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며, 세계 내의 주체들이 연결될 수 있게 한다.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의 원동력인 것이다. 무채색이기 때문에, 주변의 대상을 반사하는 빛을 통해 다양한 색깔을 낼 수 있다. 물은 모든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인어가 보여주는 재생능력은 물이 가진 생명의 원동력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영화는 이러한 물을 이용해서 독창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물에 잠긴 엘라이자의 방, 물에 잠긴 화장실에서 서로를 껴안는 엘라이자와 인어, 엘라이자의 손을 따라가는 물방울, 영화 곳곳에 배치된, 물을 연상시키는 초록의 색깔들.


물론 영화는 사랑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미지와 내레이션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을 한 편의 시로 묘사해낸다. 여기에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을 일일이 다 해석하지 않고 그저 느끼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엘라이자가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공감을 통해 인어와 사랑하듯이.. 우리는 그저 '물의 형태'라는 한 편의 시를, 다시 말해 물에 흠뻑 젖어버린 사랑에 관한 시를 만끽하면 되는 것이다.






참조_

"열등한 유전자 없애라" 미국의 지우고픈 과거, 고은아, 오마이뉴스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1980).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3rd edition. ([성소수자에 대한 12가지 질문] 4. 동성애는 정말 질병인가요? | 전환 치료의 허구성, 허핑턴 포스트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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