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짱이 Dec 17. 2021

스스로 기둥 되기

<다가오는 것들> 비평

*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명한 작가의 묘지 앞에서 밀물 때문에 자리를 떠나는 주인공의 시선에는 밀물과 묘지, 남편의 모습이 있다. 이때 제목 ‘다가오는 것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정확히 남편이 자리를 떠나는 순간에 나타난다. 이렇듯 영화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암시하게 된다.



제목 시퀀스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에게는 남편과의 이별,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이 다가온다. 남편의 외도로 인해 앞으로도 지속될 거라 믿었던 관계와 그동안 쌓아왔던 시간과 공간을 정리해야만 했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생겼을 상실감을 다스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가 이러한 굴곡들에 대처하는 방식들 중 하나는 그가 오랫동안 해왔던 철학이다. 장례식에서 그는 팡세의 글을 인용하며, 신을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신을 믿을 증거는 너무 모호하며, 확실한 믿음에 안주할 수 있도록 신의 증표를 명확히 보여주거나 차라리 아예 보여주지 말라는 것이다.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마치 둘 중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내가 삶을 살면서 신을 의지할 것인지, 신이 없다면 무엇을 의지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즉 장례식에서 주인공이 인용한 구절은 결국 내가 무엇에 의지할 수 있는지를 묻는, 방황하는 심경을 대변하는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에게 무수한 영향을 끼쳤을, 그리고 자신이 홀로 설 수 있게끔 지탱해주었을 어머니는 분명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여러 기둥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새롭게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버스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길가에서 애인과 길을 걷는 남편을 발견한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그가 남편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극복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남편은 어떤 존재일까? 섣불리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가 합리성, 이성 그 자체를 긍정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초반에 가족과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는데, 주인공이 남편이 한결같은 칸트주의자임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칸트는 어떤 존재일까?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긍정하며, 도덕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자명한 도덕이 자기 안에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런 남편이 바람을 폈다는 사실은 몹시 아이러니하고 우스운 일이다.) 당시에는 몹시 진보적인 철학자였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철학자이지만, 이미 오랜 시간 전에 칸트는 그가 긍정하는 이성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그의 도덕론에서 다루는 도덕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폭력행위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도덕론에 대한 비판은 사실 아도르노가 한 비판이다. 흥미롭게도 아도르노는 주인공의 제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기도 하다.


영화는 분명히 철학자들을 통해 인물을 드러내지만 우리가 꼭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해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칸트는 몹시 근대적인 철학자이며, 아도르노는 칸트를 비판한 철학자라는 점만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제자가 아도르노의 많은 영향을 받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인공의 남편과 제자는 서로 상반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은 또한 주인공의 과거와 오늘을 상징하기도 한다. 제자의 급진적이고 무정부주의적 모습이 주인공의 과거의 모습과 비슷하다면, 그의 현재의 모습은 결혼 생활을 통해 온건한 모습의 남편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그는 여러 굴곡들을 거치고, 옛 시절의 열정을 떠올리며 새로운 자유를 찾아 나서게 된다. 제자와의 지적인 교류를 기대하며 말이다.


하지만, 제자는 세상의 근간을 뒤흔들 혁명적 실천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보는 당위적인 사람으로 그려진다. 거기에서 그는 제자와 마찰을 빚게 되고,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수업을 통해 자신이 추구했던 자유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지난 열정을 회상하며 함께할 행복을 희망한 것이고, 정신적인 쾌락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상쇄한 거라고 말이다. 시간은 흐르고, 결국 그는 홀로 삶을 살아내게 된다. 하지만 이건 결코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니다. 애초에 주인공은 스스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단단하고 자유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단단함은 남편의 별장 시퀀스에서 상징적으로 알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제목 시퀀스에서 밀물이라는 이미지를 봄으로써 다가오는 것들을 상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별장 앞의 물 위에 떠있는 그는 온몸으로 그것들을 받아내는 형상으로 그려진다. 물이 빠진 이후의 뻘밭은 다가오는 것들 이후의 시간을 의미할 것이다. 거기에서 주인공은 기꺼이 질척거리는 뻘밭으로 발을 딛는다. 그의 맨 발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더라도 그는 기꺼이 뻘밭을 누빈다. 이러한 시퀀스를 통해 그를 둘러싼 온갖 시련들 앞에서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마주하고 안고 갈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그의 자유로움은 이미 영화의 도입부에서 나타났다. 배 안에서 그는 가족과 분리되어 있으며, 기둥을 통해 어느 남성(배우자, 혹은 제자를 상징하지 않을까?)과도 분리되어 있다. 그 어떤 범주와도 섞이지 않는 그는 오롯이 철학적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내도, 엄마도 아닌 그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한 명의 실존으로써, 묵묵히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개진해나가며 오롯이 스스로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어떤 것들에도 의존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의존해야만 한다. 그는 이미 스스로 기둥인 셈이다.


영화 말미에도 비슷한 구성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거기에서 주인공은 아이를 달래는 모습으로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보통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 울음을 터뜨린다. 주인공은 그런 아이를 달래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도움은 무얼 의미할까?


이는 초반 학교 파업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학생들이 대립하는 와중에 등장한 주인공은 두 진영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말들을 한다. 사실 그는 거기에서 양자택일을 하지 않는다. 그건 그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을 자신의 교실에 들어갈 수 있게 하고, 파업과 같은 인권운동의 근간이 되는 이론을 가르친다. 답을 내리지 않되, 학생이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이는 그가 학생들에게 주는 도움의 본질인 것이다.



주인공은 삶의 굴곡을 통과하며 묵묵히 삶을 살아낸다. 영화가 이러한 주인공을 담아내는 방식은 극적이지 않다. 도리어 카메라는 마지막에 주인공에게 거리를 둔다. 아이를 달래는 주인공의 모습을 문틈 사이로 겨우   있을 만큼 카메라는 주인공을 중심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인공은 카메라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며 나중에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된다. 결국 아무도 보이지 않는 복도만 남을 뿐이며,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마치 주인공을 향한 이입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끔 유도하는  같다. 이제 물러나는 카메라와 함께 시작되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나의 삶은 어떤지, 나는 어떻게  삶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통과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라는 생명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