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짱이 Aug 12. 2017

'비정상'의 소우주, '정상'이라는 사회

<마미> 비평

*영화 <마미>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라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뜯어서 글을 써보았다.


Counting Crows - Colorblind



자비의 돌란의 5번째 작품 <마미>는 전에도 다뤘던 '엄마'를 주제로 한다. 그는 이미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그린, <나는 엄마를 죽였다.>를 찍은 바 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엄마를 죽였다.>에서 아들은 엄마를 거부하지만 <마미>에서는 아들이 지나치게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사람들


첫 장면에서 빨랫줄에 걸린 남성용 팬티가 나온다. 그 아래에서 팬티를 향해 디안이 손을 뻗는다. 다음 장면에서 그 손은 사과를 수확한다. 이는 아들(남성 팬티)을 향해 엄마(디안)가 추구하는 어떠한 수확(사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사과나무를 살피는 디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다. 수확할 사과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탐색하는 디안의 표정에 불안함이 느껴진다.


이 불안함은 초반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디안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 소년원에서 사인을 할 때 열쇠 다발이 불안정하게 달그락거리는 장면. 카일라와 인사하는 디안이 더럽혀진 창문 속에서 겨우 얼굴만 보이는 장면. 마치 디안의 불안하고 절망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디안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가해자를 향해 ‘너는 죽었다.’ 등의 언행을 보이며, 불운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년원에서 나온 스티브는 디안과 동행한다. 디안은 스티브가 흡연을 못하게 막지만, 마지막 한 모금을 스티브에게 나누어 준다. 이는 아들을 통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디안은 사회가 청소년에게 부여하는 금기를 무시하는 어머니이니깐.


스티브는 디안과 스티브를 쳐다보는 남자 청소년을 견제하며 디안의 팔을 감싼다. 이는 디안에 대한 스티브의 애착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애착은 디안이라는 ‘주체’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엄마라는 '대상'에 대한 애착으로 보인다. 택시기사와 싸우는 장면에서 택시기사의 ‘창년’이라는 발언에 발끈한 스티브는 차에 올라가서 침을 뱉는다. 그러나 그것을 말리는 디안에게까지 거친 언행과 행동을 하는 걸 볼 때 그의 분노가 엄마라는 '대상'을 위한 분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티브가 처음 집에 들어올 때, 자기 방에 들어가서 빨간 커튼을 친다. 다음날에 빨간 커튼은 디안에 의해 수거된다. 빨강은 정열, 충동을 상징한다. 즉 스티브의 쉽게 흥분하는 특징과 활달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티브의 방이 온통 빨간색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보면, 그가 다양한 색깔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스티브는 현실과 관계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 속에만 갇혀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안은 커튼을 걷는다. 스티브가 다양한 색깔과 관계하길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디안이 찾는 수확(사과)일 것이다.


카일라의 일상도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일을 쉬고 있지만, 거의 외출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과도 제대로 관계하지 못한다. 가족 앞에서 그녀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더듬을 뿐이다. 디안과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딸이 ‘엄마’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남편이 ‘카일라’라고 부르자 비로소 반응을 보인다. 그녀의 역할이 아닌 오직 그녀의 이름에 반응하는 모습은, 카일라가 주어진 역할(엄마, 교사)에 피로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중고교 교사로 일했지만,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도 피로가 느껴진다. 그녀도 스티브처럼 현실세계의 색깔과 관계 맺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카일라는 스티브와 디엔을 만나면서 입이 트이기 시작한다. 물론 스티브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디엔의 부탁으로 일일 가정교사로 스티브의 공부를 봐주려고 하지만, 스티브는 오히려 말 더듬는 카일라를 가르치려 하고 괴롭힌다. 이 관계는 카일라의 분노로 전복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스티브가 오줌을 지리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택시기사와 다투는 장면에서 그는 조금도 공포를 느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카일라의 분노에 공포를 느끼는 건 왜일까?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기대를 배반하고 자기에게 분노하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나중에 디안이 자신의 키스를 거부하자 손목을 그어 자살시도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스티브의 사랑


스티브는 사랑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사람이다. 나중에 카일라에게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형편과 디엔의 상황을 생각해서 자신의 공부를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스티브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디엔과 카일라를 사랑하는 스티브는,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수용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스티브는 그들과 자신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스티브는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디안을 위해 도둑질을 해서 물건들을 가져오지만 디안이 자신의 마음을 봐주질 않는다는 이유로 흥분하고 디안에게 폭력적으로 대한다. 그의 의도가 전달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디안의 목을 조르게 된다. 이렇게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디안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게 된다.


또 그의 사랑하는 방식엔 관능이 빠지지 않는다. 해고당해 눈물을 흘리는 디안의 입을 틀어막고 틀어막은 손등에 키스를 하는 장면은, 엄마에 대한 사랑과 연인과의 사랑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카일라를 초대했을 때에도, 카일라와 디안에게 관능적인 몸짓을 보인다. 디안에게 관능적 스킨십을 서슴지 않으며 심지어 그녀의 가슴을 만지려고도 한다. 엄마와의 관계에서조차 그에겐 관능이라는 금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나중에 디안의 사랑을 더욱 갈구하는 스티브가 디안에게 키스한다. 그것이 그가 사랑하는 방식이지만, 이 방식이 디안을 더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자유롭지만 폭력성과 부족한 고민으로 인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스티브의 자유


영화에서 그의 자유를 막는 것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이다. 중간에 피해보상금을 요구하는 청구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그러나 그 자유로부터 비롯된 불가항력의 장애물이다. S14 법안을 수용한 디안의 선택도 스티브의 자유가 가져온 결과물이다. 사회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자유를 통제한다. 통제는 지나친 자유를 바로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를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수용소에 끌려가는 모습도 꽤나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스티브는 자신을 잡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 맞선다. 그러나 그들은 스티브를 제압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전기 충격을 감행한다. 이에 디안은 스티브를 잡아가는 사람들을 욕한다. 디안은 통제하는 사람들이 스티브를 주체로 대하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러나 스티브는 구속복을 입게 되고 주체적으로 맺는 관계는 사라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티브는 침묵을 하고 있고, 오직 그를 다루는 사람들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디안이 s14 법안을 선택할 정도로 스티브에게 바라는 건 그녀의 환상을 통해 드러난다. 스티브가 꿈을 이루고 짝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수확(사과)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스티브를 통제하는 결말을 보여주지만, 그 통제를 스티브의 탈출하는 몸부림을 통해 부정한다. 스티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무엇일까?





'비정상'의 소우주


영화에서 디안, 스티브, 카일라가 모일 때, 그들은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행복하게 그려진다. 여기서 자유는 트라우마로 형성된 것들로부터, 장애라고 취급되는 것으로부터, 사회적으로 합의된 도덕과 질서로부터의 자유이다. 디엔, 카일라, 스티브는 각자 부족한 인물로 취급되지만 서로의 관계를 통해 자유를 보장받는다. 디안은 카일라와 의 도움으로 스티브에 대한 돌봄에 대한 수고를 덜게 되고,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노동에 더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스티브는 디안과 카일라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카일라는 ‘엄마’로서가 아닌 ‘카일라’로서 존재하게 되며, 말더듬이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자유엔 한계가 있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다시 억압으로 돌아간다. 스티브는 현실세계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는 스티브를 비정상으로 취급하고 스티브를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자신의 색깔을 지우려 하는 현실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스티브는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을 훼손한다.


스티브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특히 자신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할 때 그는 분노한다. 또 그는 여성을 관능의 대상으로 대한다. 카일라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자기야.’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것. 디안에게 유혹하는 몸짓을 하거나, 디안에게 키스하는 것. 이러한 행동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유도한다. Adhd 증후군이라는 점을 미루어보아 스티브를 비정상적 아이로 볼 수도 있겠지만, 판단을 유보하고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도록 하자.



'정상'이라는 사회


우선 영화에서는 스티브, 디안, 카일라를 제외한 다른 사회적 관계들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거의 미시적인 세 사람들의 관계만을 보여줄 뿐이며, 그들이 왜 현재 이런 모습인지에 대해서조차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카일라가 어떤 사건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이라는 상상을 할 뿐이며, 스티브가 어떻게 adhd 진단을 받고 어떻게 악화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그저 디안의 몇 마디를 통해 가늠할 뿐이다.


그러나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들은 있다.

스티브의 행동들은 통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남성성의 모습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대하는 모습, 자신의 의도가 관철되지 않을 때 보이는 분노, 자기 중심성, 이런 것들은 옛날부터 유지되어 온 가부장적 남성성을 구성한다.


디안은 보통 청바지를 입는다. 그러나 영화에서 디안은 네 번 치마를 입는다. 먼저 번역 일을 구하러 갈 때 그녀는 치마를 입는다. 여기에서 치마는 여성이 입는 옷으로서의 격식이 된다. 그리고 남성 상사가 있는 사무실에 갈 때 그녀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간다. 그러나 상사 대신 그의 아내가 그녀를 맞이한다. 그녀는 디안을 이쁜이라고 부르는 등, 디안을 상사에게 꼬리 치는 여성으로 낙인찍고 해고한다. 여기에서 디안은 사회가 요구하는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여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디안은 이쁜이라는 말을 사양한다.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섹슈얼리티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이는 폴과의 데이트에서도 드러난다. 폴을 유혹하기 위해 열심히 치장하는 디안의 모습은, 원치 않는 가부장적 현실과의 불가피한 타협인 것이다. 전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섹슈얼리티를 다른 남성에게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오직 카일라가 집에 놀러 올 때, 시스루와 치마를 입은 디안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멋을 내기 위해 그러한 옷을 입는다.


중간에 셀린 디온의 노래를 틀며 치장을 한 스티브는 꽤나 ‘퀴어’스럽게 보인다. 매니큐어나 화장을 한 스티브는 통상적인 남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리고 가라오케에서 그가 디안을 향해 노래를 부를 때, 사람들에게 호모라는 놀림을 받는다. '남성'이라는 정체성과 '이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퀴어는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스티브의 남성성은 현실 사회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 본래 스티브의 정체성을 짓누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스티브의 극단적인 모습을 통제하려 한다. 사회는 스티브를 비정상으로 본다. 치료의 대상으로 여긴다. 사회 내부의 염증은 남겨둔 채로 말이다.


마지막에 스티브가 구속복에서 벗어나 출구를 향해 달려간다. 스티브가 벗어나려는 통제는 사회적 산물이다. 부조리한 사회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그러나 사회는 자신의 색깔을 포기하지 않는 스티브를 규정하고 변이 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산물로부터 벗어나는 스티브조차 사회적 산물이다.



엄마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스티브도, 디안도 아닌 마미이다. 디안은 ‘엄마’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 더 정확히는 남편을 잃고 경제부양과 돌봄 노동을 해야만 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스티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 물론 그녀는 스티브를 사랑한다. 그녀는 스티브가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엄마이다.


카일라는 오히려 ‘엄마’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듯하다. 그녀는 딸아이의 ‘엄마’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가족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카일라와 스티브를 만나면서 비로소 말을 하게 된다. 사회에서 소수자로 낙인찍히는 그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존재감이 지워졌던 카일라는, 스티브와 디안과의 관계에서는 점점 카일라로서의 존재감을 완성시킨다. 다시는 교사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그녀는 결국 기쁘게 스티브를 가르치지 않는가?


따라서 이 영화는, ‘엄마’라는 역할을 경유하는 두 사람과, ‘엄마’에게로 향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엄마’는 경유될 뿐. ‘엄마’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와 이해로부터 벗어나는 개인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엄마’에게로 향하는 개인은, (영화가 노골적으로 내포하는 정신분석학적 아이디어를 빌리자면) 아버지의 부재로 아버지에 관한 증오를 선망으로 전환하지 못한,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남자아이이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개인은 아버지라는 사회적 산물을 그를 둘러싼 규율을 통해 배운다. 물론 동시에 그를 자체로 받아들일 줄 아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며, 그것은 이름 그대로 죽음에 대한 충동이다. 정신분석학을 온전히 알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해당 아이디어를 자의적으로 연결해 보자면, 죽음 충동이라는 건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부조리한 사회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질식할 것 같은 사회의 영악함에 대한 몸부림인 것이다. 여기에서 ‘죽음’과 어머니에 대한 성애로서의 ‘사랑’은 충돌한다. 스티브는 마미의 남편이 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구성한 사회로부터 도망치고자 마미(죽음)로 나아간다.


영화의 인물들은 사회로부터 비정상, 비주류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이지만, 사회가 지워지고 그들만의 소우주가 형성될 때 그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사회로부터 격리된 완전한 소우주는 불가능하다. 마미라는 역할, 마미를 사랑하는 남자라는 역할에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시에 마미라는 죽음으로 도달하고자 한다. 지극히 원초적이면서도 지극히 사회적이다. 구성되었으나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위태로움. 그것이 마미가 함축하고 있는 자유의 두 가지 성질이다.






돌란은 이 영화를 통해 사회 속에서 낙인찍히거나 변해버릴 수밖에 없는 소수자들 간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서 얻는 자유와 어긋남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어떤 대안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소수자로서의 자신과 엄마와의 관계를 반추하면서 끄집어낸 여러 감정, 느낌, 생각들은 영화에 스며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찰나로 남을 지라도, 흩어진 이들이 다시 소우주를 만들어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넓혀지지 않는 프레임 속에서도 묵묵히 출구를 향해 달리는 스티브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차별과 공포의 상관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