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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빈 Jan 13. 2022

무언가를 기르는 힘

사랑하는 고양이를 떠나보내고 식물을 말려 죽였다

작년 11월, 7년 동안 함께한 고양이 달리를 떠나보냈다. 서글프고 빛났던 내 20대의 모든 순간들을 함께 했기에 내 일부분이 잘려 나간 기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직접 씻기고, 먹이고 보살피며 주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 꼭 자식을, 사랑을 잃은 것만 같았다. 얼마 전, 달리가 꿈에 나왔다. 집 거실 캣타워에서 잠시 일광욕을 하더니 내게 목걸이를 하나 물어다 줬다. 금색 체인에 작은 큐빅이 달린 평범한 목걸이였다. 달리는 그렇게 선물을 주고 사라졌다. 


이전에도 몇 번 달리 꿈을 꿨지만, 이번 꿈은 너무도 선명해서 달리가 나를 보러 찾아온 게 분명했다. 아직 너의 이름을 부르며 앓고 있는 내가 걱정되어 온 걸까. 꿈속의 그날은 햇살이 눈 부셨다. 빛을 받아 목걸이가 반짝였다. 빛에도 목소리가 있었다. “괜찮아.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그만 슬퍼해.” 


달리가 다른 세계로 건너간 이후 모두가 나를 걱정했다. 집에서, 회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터지는 나를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나는 더욱 과하게 웃어 보이고 깔깔댔다. 밖에서는 괜찮은 척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지금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무너져 울기를 반복했다. 자주 울어서 배도 자주 고팠다. ‘달리가 없는데 밥을 시켜 먹네. 와중에 배달료 싼 곳을 참 꼼꼼히도 찾네.’ 평범한 일상이 가증스러워서 내내 비웃었다. 


평소 집에서 애정을 담아 살피는 건 달리와 식물이었다. 고양이 집사로, 식물 집사로 집이라는 공간에서 스스로 역할을 부여하며 마음껏 행복했다. 달리를 보낸 후, 매일 손가락을 찔러 넣어 화분 속 흙의 습도를 확인하고, 정성스레 잎을 닦아주는 일이 하기 싫었다. 줄기가 말라가는 걸 봤지만 못 본 척했다. 무언가를 보살피는 일은 곧 나를 보살피는 일이었기에, 나는 나를 잠시 놓은 것이다. 


그렇게 식물들은 하나둘 죽어갔다. 말라비틀어져 떨어진 이파리 부스러기가 발에 밟혔다. 발바닥을 털며 생각했다. ‘너도 폐허지? 지금 이 공간만은 당연히 모두 슬픈 모습을 하고 있으면 좋겠어.’ 이상한 고집이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본 S가 마음을 놓은 날은 그로부터 두 달 후, 내가 화분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죽은 식물을 비우고 화분을 수세미로 깨끗이 닦았다. ‘이제 나를, 일상을 잘 챙겨 볼게’ 식의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달그락거리는 화분 소리에 안심하는 듯했다. 


빈 화분에 새로운 식물 친구들을 하나 둘 들이며 무언가를 다시 기르기 시작했다. 폐허였던 집이 다시 찬 겨울바람이 불고 잠깐은 따뜻한 햇볕도 드는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매일 밤 달리가 보고 싶지만, 상실을 일상으로 편입시켰다고 해야 할까. 상실만으로 가득 차지않게 마음을 무언가에 나눠줄 계획도 세웠다. 매일 아침 일어나 제일 먼저 식물을 살피고, 저녁에는 뭐가 됐든 글을 써보기로 했다.  


어제는 화분에 뿌리가 가득 찬 식물 친구 둘을 새집으로 이사시켰다. 한 움큼 흙을 잡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이 손으로 사랑하는 내 고양이를 쓰다듬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뭐든 움켜잡으며 살 수는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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